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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요한계시록 순수강해 40번째 시간으로서 “천상에서의 거룩한 행함”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부터는 이제 요한계시록 4장으로 접어듭니다.
우리가 이번 강해를 시작하기 전에 4회에 걸쳐서 계시록의 비밀과 비결이라는 제목으로 이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고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오늘부터 시작하게 될 계시록 4장 이후의 강해에서도 다시 반복해서 말씀드리게 되는 경우도 있겠습니다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여러분의 이해와 양해를 바랍니다.
다시 말씀드려야 하는 이유는, 처음부터 들으시는 분들께서는 모두 기억하시겠지만, 도중부터 들으시는 분들도 계실 것이고, 그리고
무엇보다 그에 대한 내용을 다룬 것이 1년 전이었기 때문에 기억하지 못하시는 분들도 많이 계시지 않을까 해서입니다.
이 요한계시록을 살펴볼 때 많은 신학자들은 어떻게든 그 해석에 있어서의 정답을 내려고 애를 쓰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특별히 이 4장 이후는 더욱 그런 모습들이 두드러집니다. 제가 여러 주석서를 보더라도 어떤 구절에 대해서는 신학자들에 따라 그
해석이 대여섯개 이상으로 나누어지는 경우도 보여집니다.
그렇다면 그 부분에 대한 정답이 그렇게 많다는 것인가 하면, 아니요, 그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답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마다
해석이 분분하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자, 우리가 생각할 때 성경해석에 있어서의 정답이라고 하면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예, 그것은 바로 성경에서 그 내용이 뒷받침 되었을 때 그것을 정답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서 예수님은 2000년 전에 메시아로서 오셨습니다. 그것이 정답인가요?
예, 정답이에요. 그렇다면 왜 이 말씀이 정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구약에서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것이며,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되어 있었잖아요.
그리고 그 예언대로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그러니 이는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정답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성경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를 억지로 풀어서 해석을 한다거나 하게 된다면, 이는 자칫 잘못하면 성경을
오해하거나 잘못 해석하는 일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경계해야 하는 자세 중에서 ‘상징’이라고 하는 덫이 있습니다.
계시록 만이 아니라 성경에는 여러 곳에 여러 형태로 상징적이 내용이 있지요.
하지만 당장에 해석상 어려움이 있다고 해서 무턱대고 이것도 상징이고 저것도 상징이라는 식으로 규정을 하게 된다면 성경 전체를
실체가 없고 공허한 말씀으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게 됩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천지창조도 상징이고 노아의 홍수나 출애굽도 상징이고, 나아가 하나님이나 예수님도 상징, 십자가도 상징이라는
식으로까지 비약할 수도 있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내용에 대해서 그 부분에 대한 명확한 근거를 성경에서 찾을 수 없다면, 이를 무리하게 해석하거나 또는
무턱대고 상징적인 표현이라는 식으로 해석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현재로서는 자세히 알 수 없더라도 이를 성경말씀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이 부분을 분명히 염두에 두고 오늘 본문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까지의 말씀에 있어서 그 무대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세계였다고 한다면, 이제 그 무대가 어디로 옮겨갑니까.
예, 하늘로 옮겨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4장 1절 기록에 의하면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그리로 올라오라는 말씀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들리는 말씀이 이 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보여주시겠다고 하셨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 후에 일어날 일’이라고 하는 것이 언제인지가 문제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일부 신학자들은 유대가 로마에 의해 멸망 당한 때를 말한다고 합니다.
이는 이 부분만이 아니라 계시록 전체를 이미 일어난 역사적 사건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어요.
만약 로마에 의한 멸망이나 역사적인 사실이 계시록 기록이라고 한다면, 여기에 기록된 말씀은 이미 성취된 내용이라는 뜻이잖아요.
그렇게 되면 요한계시록은 계시록이 아니라 다른 선지서나 예언서와 같다는 뜻, 그러니까 우리에게 있어서 모두 과거에 일어난 사건들을
예언한 내용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이 되고 맙니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서 수긍할 수 없는 이유는, 만약에 여기에 기록된 환난이 모두 끝난 일에 대한 말씀이라고 한다면, 계시록
마지막에 등장하는 궁극적 구원 또한 성취되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아직 그와 같은 영원한 구원이 성취되었다고 보는 신학자들은 많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4장부터 시작하는 내용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있어서도, 이 계시록이 기록될 당시처럼 아직
이루어지지 않는 사실에 대해서 보여주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여기 본문에서 ‘마땅히 일어날 일’이라고 하는 것은, 이는 쉽게 말하자면 ‘반드시 일어날 일’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 기록된 말씀은, 어쩌면 일어날 수도 있고 안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 아니라, 장차 반드시 틀림없이 일어날 일이라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자, 이제 밧모섬의 요한이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하늘의 열린 문을 통해 올라가서는, 현실에서는 볼 수 없는 하늘나라 모습을 보게
됩니다.
거기서 그는 무엇을 보았습니까.
예, 바로 하늘에 보좌가 있고 거기에 하나님이 앉아 계셨어요.
앉아 계신 하나님의 모습은 각종 보석 같았으며 거기에는 무지개도 보입니다.
그리고 그 보좌 주위에는 이십사 보좌가 있어 그 곳에 금관을 쓴 이십사 장로들이 앉아 있었다고 해요.
보좌에서 번개와 음성과 우렛소리가 나고 보좌 앞에 켠 등불 일곱이 있었는데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고 합니다.
또한 6절에서 9절의 기록에 의하면 네 생물이 나오는데 그 생김새에 특징이 있다고 해요.
여기서 생김새라고 하는 부분은 그 외모가 사자나 송아지나 사람이나 독수리 같다고 하는데, 놀랍게도 이는 에스겔서 1장 10절,
10장 14절 기록과 일치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와 같은 생물들에게 눈들이 가득하다는 표현도 에스겔서 10장 12절과 역시 동일해요.
신학자들에 의하면 에스겔서의 기록연대는 대략 기원전 570년에서 590년 경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계시록은 기원후 90년 경에 기록되었다고 하니 여기에는 적어도 700년 가까이의 기간이 있어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구체적인 내용이 일치한다는 것은, 이는 에스겔이나 요한 모두 추상적인 표현이나 상징적인 의미가
아니라 직접 자신이 본 그대로를 기록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럼 이와 같은 생물들의 정체가 뭐냐 하는 궁금증이 생기잖아요.
이에 대한 힌트는 8절에 있습니다. 여기에 보시면 네 생물들이 각각 여섯 개의 날개를 가졌고 밤낮 쉬지 않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하잖아요.
이사야 6장을 보시겠습니다.
이사야 6장 1절~3절
“1.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2.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3.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성경에 등장하는 천사들을 보면 미가엘이나 가브리엘과 같은 천사들 외에도 그룹과 스랍이라고 하는 이름의 천사들이 등장합니다.
이 중에서 날개가 여섯이 있으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천사는 스랍밖에 없어요.
이사야서 6장에서는 얼굴을 가려서 확인할 수 없었는데 이 구절에서 비로소 그 모습을 알 수가 있게 된 것이지요.
다음으로 10절에 보시면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곧 하나님께 엎드리고 경배하며 자기의 관, 다른 번역본에는 금관이나
면류관이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자신이 쓰고 있는 관을 보좌 앞에 드리며 또한 찬양한다고 합니다.
자, 여기까지가 계시록 4장 내용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이 말씀에 대한 강해나 주석이나 신학자들의 해석들을 보면 아쉬움이 남습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들 때문에 그렇습니다.
일반적인 성경주석들을 보면 우선 하나님께서 앉으신 모습을 나타낸 벽옥과 홍보석에 대한 의미, 그리고 무지개에 대한 해석, 스랍
천사들의 모양새나 여기에 등장하는 숫자에 대한 의미 등을 놓고 여러 신학자들의 주장들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그것이 공부를 많이 하는 신학자들 사이에 있어서는 자신들의 여러 해석이나 학설을 놓고 갑론을박 하는 것이 유의미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성경을 구원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우리도 그와 같은 해석의 차이를 꼭 알아야 하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적지 않게
회의적입니다.
그 이유는 어떤 한 구절에 대해서 다양한 해석이 있다는 것은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정답, 다시 말해서 성경에 근거한 해석이
없다는 뜻이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모든 성도들이 하나하나 다 알아야 할 의미를 찾기 어렵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이점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부족해서라기보다는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 때가 이르게 되면 모두가 알게 될 일을 두고 아직 근거도 부족한 상태에서 단순히 신학자들의 논의에 관여할 의미는
크지 않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벽옥이 무엇이고 홍보석이 무엇인지, 이십 사 장로가 왜 이십 사 장로인지는 성경에 명확히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이유는 성경이 불완전해서가 아니에요.
그것이 아니라 어차피 나중에 알 수 있게 되겠지만 지금 우리에게 있어서는 몰라도 되는 부분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음에 나오는 이십 사 장로들에 대해서도 참 독특합니다.
왜 장로들이 이십 사, 즉 스물 네 명이냐 하는 점에 대해서 누구는 이렇게 말해요.
이는 구약의 열 두 지파와 신약의 열 두 사도를 나타낸다는 것이에요.
그런데, 그러면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전에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 계시록을 쓴 요한은 정확히 어떤 요한인지 불분명하다고 말씀드렸잖아요.
많은 사람들은 이를 사도 요한이라고 본다고 하는데, 아니, 그렇다면 천상에 앉아 있는 스물 네 명중 하나가 사도요한이라고 하면
이를 보고 있는 사도 요한은 누구라는 뜻입니까.
아니면 그렇게 주장하시는 분들은 저처럼 이 계시록을 기록하는 요한은 사도 요한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것인가요?
사실 알고 보면 신학을 구성하고 있는 내용, 여기서 오해 없기를 바랍니다. 성경을 구성하고 있는 내용이 아니라 신학, 즉
신학자들의 주장으로 구성된 내용들을 보면 간혹 이렇게 허술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와 같은 주장을 분별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예, 그렇죠. 우리가 성경을 잘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부분에 대해서 세부적으로 하나하나가 무엇을 상징하고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에 대해서 신학자들처럼 논쟁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하겠습니다.
그것보다는 일차적으로 우리는 마치 눈앞에서 이와 같은 장면이 실제로 펼쳐진다는 식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점이 중요하겠지요.
자, 지금까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장면들, 잘 들으셨죠?
그렇다면 여기서 여러분께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4장을 보았을 때 대부분 멈춰 있는, 말하자면 정지 상태에 있는 장면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좌에 계시고 이십사 장로들도 각 보좌에 다 앉아 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시면 움직이는 장면들이 있어요.
이에 해당하는 장면은 두 가지가 있는데 그 움직이는 장면이란 무엇일까요.
예, 하나는 스랍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이고, 또 하나는 이십사 장로들이 자신의 금관을 하나님 보좌 앞에 드리는 장면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 부분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스랍들은 왜 하나님 찬양을 멈추지 않는 것일까요.
사실 여기에 주목한 분들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여기서 그 앞에 있는 구절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그 부분은 바로 8절 전반부예요.
요한계시록 4장 8절 전반부
“네 생물은 각각 여섯 날개를 가졌고 그 안과 주위에는 눈들이 가득하더라……”
스랍에게 여섯 날개가 있는 것은 알겠는데 그 안과 주위에 눈들이 가득하다고 합니다.
예전에 어디서 보니까 이 구절을 근거로 해서 그려 놓은 그림을 본 적이 있어요.
사실 하나님 곁에서 밤이나 낮이나 하나님을 찬양하는 천사라고 하면 얼마나 거룩하겠습니까. 그런데 그 그림을 보니까 얼마나 무서운지
몰라요.
그도 그렇겠지요. 사람이나 독수리는 그렇다고 치고 사자나 송아지도 각각 날개가 그것도 여섯 개 씩이나 달려 있대요. 뿐만 아니라
그 안과 주위에는 눈들이 가득 달려 있다고 하니 얼마나 무섭겠습니까.
그런데 계시록 기자는 그 모습이 얼마나 무섭게 생겼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어요.
그 이유는 이는 우리가 이 글을 보고 상상하면 무섭게 느껴질 지 모르겠지만, 사실 이 부분에 있어서의 핵심은 무서운 생김새가
아니기 때문이겠지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항상 찬양하나요?
여러분 마음에는 밤이나 낮이나 거룩한 주님을 찬양하는 마음으로 충만합니까.
언제 어디서 어떤 때든지 주님께 감사하고 주님만을 바라보고 주님만을 의지하십니까.
예, 아멘. 네. 진정으로 그렇게 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지만, 예, 그렇죠. 알아요. 사실 그게 쉽지 않잖아요. 나에게 좋은 일이 일어나면 그야 기뻐하고 감사하고 할렐루야 소리도
나오겠지요.
하지만 솔직히 말이야 바른 말이지, 우리에게 안 좋은 일이 닥쳤을 때, 고통과 고난의 시기를 지나고 있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을까요. 온 마음을 다해 예수님을 찬양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는 하지만, 막상 그러기는 힘들지요.
욥기 2장에 의하면 누구보다도 부유했던 욥이 자녀와 전재산을 잃은 것도 모자라 온몸에 종기가 나는 병까지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욥은
하나님을 저주하는 죄를 범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우리가 믿음이 있다고는 해도, 역시 그런 것이 어디 쉬운 일이겠습니까.
우리가 끝까지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예수님을 의지하지 못하여 도중에 넘어지고 마는 이유는, 어쩌면 우리가 눈을 두 개 밖에 갖지
못해서가 아닐까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3절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로마서 8장 2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주님이 우리에게 시험을 허락하시는 것은 우리를 강하게 하시기 위해서이며, 우리가 어려움을 당하는 것처럼 보여도 우리가 주님을 알고
우리가 많은 눈으로 진정한 주님을 바라볼 수 있다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줄 믿을 수 있겠는데, 우리 마음의 눈이
너무나도 부족해서 너무나도 근시안적으로 일희일비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로마서 8장 32절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예, 정말 그렇지 않아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나 하나 살려보려고 온 천하 우주 만물보다도 귀하신 예수님의 보혈,
예수님의 생명까지도 주셨는데, 더 이상 우리를 위해 무엇을 아끼시겠습니까.
어떠한 시험이 닥쳐 와도 우리를 위해 예수님까지도 아끼지 않으신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모든 시험들을 감당하게 하시고, 마침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움직이는 장면은 어디입니까.
예, 오늘 말씀 중에서 10절에 보시면 자신의 관을 하나님 보좌 앞에 드리는 장로들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기 관을 벗어서 하나님께 드린다고 하면 그 뜻은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해외에서 그 나라 대통령 같은 국빈이 우리나라에 오면 의전행사가 열리게 됩니다.
그 행사를 유심히 보면 여러분도 아마 보신 적이 있으실 거예요.
무슨 대포를 발사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것도 한 두 발이 아니에요.
국빈의 격에 따라서 그 발포 수가 결정되는데 최고인 국가원수인 경우에는 무려 스물 한 발이나 발사한다고 합니다.
당연히 발사하는 것은 실탄이 아니라 공포탄이지요.
그렇다면 이는 무슨 축포냐 하면 아니요, 그게 아니라, 이는 17세기 영국 해군에서 시작한 외교행사라고 해서, 자신들에게 싸울
의사가 없다는 뜻으로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탄약을 소진 시켰던 일에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귀빈들이 왔을 때에는 존중과 경의를 표하는 의미에서 예포를 쏜다고 하는 것이지요.
오늘 본문에서 보여지는 하나님께 드리는 금관도 역시 그와 같은 의미라고 할 수 있을 지 모르겠습니다.
욥기 1장 21절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라 하고”
고린도전서 15장 10절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으로 주님께 충성한 하나님의 모든 백성에게는 하나님으로부터 승리의 면류관이 주어집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내 힘으로 얻은 것이 아닌 모두가 다 하나님의 은혜로 받았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 바로 우리의 면류관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일이 아닐까 합니다.
아무리 내가 가진 것이 많더라도, 아무리 내가 남들보다 뛰어나다 하더라도, 그것은 내가 내 힘으로 된 것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우리가 교만해질 이유도 없으며, 또한 주님께서 쓰시고자 한다면 언제든지 주님을 위해 내 놓을
수 있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은 밧모섬의 요한이 바라본 천상에서의 두 가지 행함,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귀한 행함으로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이제 우리의 남은 삶 동안에, 우리를 위해 예수님까지도 아낌없이 주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줄 믿으시고,
귀한 행함을 통해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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