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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요한계시록 순수강해 37번째 시간으로서 “뜨거운 신앙과 차가운 실천”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교회로 보내지는 편지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이제 오늘은 마지막 일곱 번째 교회인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해서 알아볼 차례입니다.
여기에도 대단히 중요한 내용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주의 깊게 공부해 보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지금까지 보아 왔던 다른 교회들처럼 도입부에서는 수신하는 교회와 발신자의 권위에 대해서 살펴보아야겠지요.
오늘 본문 14절에 의하면 수신하는 교회는 라오디게아 교회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발신자의 권위에 대한 내용이 등장하게 되는데, 이는 대단히 인상적입니다.
여기에 보시면 발신자의 권위에 대해서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지금까지 편지의 내용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이 모든 편지는 예수님께서 친히 밧모섬의 요한에게 편지를 쓸 것을 명하고
계신데, 각 편지마다 그 권위에 대한 내용에는 차이가 있었지요.
그런데 오늘 라오디게아 교회로 보내지는 편지에 기록된 발신자의 권위는 그 중에서도 대단히 주목할 만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그 권위가 세 가지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아멘이신 분, 둘째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신 분, 그리고 셋째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분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먼저 ‘아멘이신 분’에 대해서 살펴볼까요.
‘아멘’이라고 하는 말은 우리에게 대단히 익숙한 말인데, 이는 히브리어 ‘아만’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뜻은
‘진실되다’, ‘확실하다’, ‘참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주님의 속성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주님은 진실되시며 확실하십니다. 그리고 참되십니다.
또한 ‘아멘’이라고 하는 말은 하나님의 뜻대로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믿는다는 신앙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14장 24절
“만군의 여호와께서 맹세하여 이르시되 내가 생각한 것이 반드시 되며 내가 경영한 것을 반드시 이루리라”
그렇습니다.
아멘이신 주님께서는 그 하고자 하시는 일을 반드시 이루시는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신 분에 대해서 알아봅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에는 충성된 종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창세 이후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단 하나를 원하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예, 그것은 바로 순종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순종을 알지 못했어요.
그저 때가 되면 양이나 염소를 바치기만 하면 그것이 순종인 줄 착각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오셨습니다.
그러고는 무엇이 순종인지, 무엇이 충성인지, 그리고 무엇이 복종인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생애에 있어서 온전히 하나님께 순종하는 충성된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주님은 참된 증인이십니다.
시편 139편 7절에서 10절입니다.
“7.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8.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9.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10.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사람의 낯은 피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주님의 눈은 피할 수가 없어요.
언제 어디에 있든지 주님은 우리를 지켜보고 계시기 때문에 주님께서 가지고 계신 증거는 완전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참된 증인이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님은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시라고 기록합니다.
이는 요한복음의 기록과도 부합합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는 예수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요한복음 1장 2절~3절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누구는 예수님을 피조물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이는 성경 읽기를 게을리한 데서 비롯된 무지한 주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예수님은 태초, 즉 천지만물이 창조되기 이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모든 만물 또한 예수님 없이 된 것이
없다고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다시 말해서 모든 것이 예수님을 통해서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사람과 같은 피조물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와 성령님과 함께 이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상과 같은 내용을 보시면 어떻습니까?
이는 다른 편지에 등장하는 발신자의 권위보다 훨씬 더 강한 본성을 나타내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자, 그렇다면 이와 같은 강한 권위를 강조하시면서 전하고자 하신 말씀은 어떤 내용일까요?
이는 바로 다음 구절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 15절~16절
“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여러분께서는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십니까?
사실 저도 이 말씀에 대한 설교를 지금까지 몇 번 들어 보았습니다. 그리고 주석서나 인터넷을 통해서도 여러 해석을 살펴보았어요.
그런데 조금 심각한 문제점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설교를 보면 이를 뜨거운 믿음과 차가운 믿음으로 구분해서, 우리는 뜨거운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말씀이라고 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외에 흥미로운 것은, 이를 “뜨겁게 믿든지 아니면 믿지 말든지 하라”는 식으로 이해하시는 분들도 계신 것 같더군요.
항상 제가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성경을 우리가 공부할 때 조심해야 할 부분은 바로 독해력입니다.
일반 시험문제도 그렇습니다만, 독해문제를 잘 풀기 위해서 중요한 것 중 하나는 본문을 철저하게 분석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를 방해하는 요소가 있는데, 그것이 뭐냐 하면, 그것은 바로 ‘내 생각’입니다.
독해문제를 제대로 풀기 위해서는 본문의 내용 또는 그 본문을 쓴 필자의 생각이 중요한 것이지, 그와 동떨어진 ‘내 생각’은 하나도
중요하지가 않거든요.
하지만 앞서 말씀드린 해석들은 모두 다 ‘내 생각’에 사로잡힌 결과, 본문 내용의 핵심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온
주장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이 본문을 쓴 필자의 생각, 즉 주님의 생각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선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많은 사람들은 이 말씀을 ‘신앙’ 또는 ‘믿음’이라고 이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5절과 16절에 ‘신앙’ 또는 ‘믿음’이라는 말이 나오나요?
예, 나오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구체적으로 무엇에 대한 말씀입니까?
15절은 어떻게 시작합니까?
요한계시록 3장 15절 초반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예, 그렇죠.
이 말씀은 신앙 또는 믿음이라기보다는 ‘행위’에 대한 말씀이라는 점을 우선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두 번째입니다.
이 구절에 대한 설교들을 보면 대부분 당시 라오디게아 교회가 있던 지역의 특성을 언급합니다.
그러면서 당시 그 지역의 온천수나 기타 물 사정에 대한 내용을 설명합니다.
어떤 분은 이와 같은 사정을 알아야만 이 말씀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며, 이를 모를 경우에는 성경을 잘못 이해할 수도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 주장에 대해서 적지 않은 의문을 가집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냐 하면, 만약에 그와 같은 주장, 그러니까 성경에 적혀 있지 않은 내용을 반드시 알아야만 올바로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면, 이는 다시 말해서 성경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성경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무엇입니까?
성경이란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유일하고도 완전한, 오류가 없고 모순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물론 성경 외에 다른 참고서나 자료들이 있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성경의 이해를 돕는 역할을 할 수는 있지만, 성경 이해를 위해 반드시 있어야 하는 책, 그 책 없이는
성경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책이 있다고 한다면, 이는 이단이나 사이비 집단들이 주장하는 이른바 ‘또 하나의 성경’이 필요하다는
것과 다름이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오늘 본문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라오디게아의 역사적·지리적 배경을 살펴보는 것은 본문 이해에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배경지식이 성경 자체를 대신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배경은 성경을 해석하는 보조자료이지, 성경에 또 하나의 계시를 더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성경을 대할 때 물론 다른 참고가 되는 책들은 많이 있을 수 있고, 또한 그런 책들이 있는 것이
바람직하겠습니다만,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는 핵심은 바로 성경만으로도 우리는 하나님의 완전한 말씀을 들을 수 있고, 성경 말씀
만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들어 본 설교들은 대부분 ‘뜨거운 것’에 대한 내용 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은 정말로 뜨거운 것만이 좋다고 말씀하고 계실까요?
우선 이 말씀이 행위에 대한 내용이라고 한다면, 여기에 등장하는 차가운 것과 뜨거운 것, 그리고 미지근한 것은 모두 ‘행위’에
대한 표현이라는 점을 알 수 있겠지요?
여기서 알기 쉽게 하기 위해서 ‘차가운 행위’를 A라고 하고, ‘뜨거운 행위’를 B, 그리고 ‘미지근한 행위’를 C라고
해보겠습니다.
그렇다면 15절과 16절은 어떻게 됩니까?
“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A도 아니하고 B도 아니하도다 네가 A든지 B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 네가 이같이 C하여 B하지도 아니하고 A하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15절에서는 분명 A만 하라거나 B만 하라고 말씀하고 계시지 않습니다.
A든지 B든지 하기를 원한다고 하시면서, 16절에서는 A하지도 B하지도 않고 C하기 때문에 토해 버리겠다고 하세요.
즉 주님께서는 이 말씀에서 C, 즉 미지근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차든지 뜨겁든지 하라고 하시잖아요.
그런데 왜 많은 사람들이 뜨거운 것에 대해서만 말씀을 전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지요.
하물며 차가운 것을 믿음이 없는 것으로 해석한다면 어떻게 됩니까?
믿음이 있든지 없든지 하라?
주님께서는 정말로 그러신다는 것입니까?
이는 말이 안 되는 주장이지요.
또한 누구는 차가운 것을 이성적인 믿음이라고 주장합니다.
만약에 정말 그렇다면 뜨거운 것은 본능적인 믿음입니까?
이 역시 대단히 부적절한 해석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신앙에 있어서 세 가지의 ‘분’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바로 흥분, 기분, 그리고 분위기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한순간의 분위기에 휩쓸려 흥분하고, 기분에 따라 믿게 된다면 어떻게 됩니까?
과연 그것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뜨거운 믿음입니까.
그런 믿음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크고 작은 시험이 닥쳐오면 살얼음처럼 사라지고 마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 뜨겁고 차가운 행위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라고 이해해야 할까요?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이 점에 대해서는 견해가 일치하지 않고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에 적용하면서, 뜨거운 행위는 하나님을 향한 신앙적 열정으로, 차가운 행위는 말씀을 실제 삶
속에서 실천하는 행함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합하지 않을까 합니다.
특히 우리 한국의 신앙을 본다면 유독 신앙적인 행위에만 치중되어 왔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은사주의나 신비주의와 같은 경향이라고 할 수 있어요.
믿음이 좋은 사람은 무엇을 해야 한다?
예, 방언을 해야 한다.
병에 걸리면 어떻게 한다?
예, 기도하면 낫는 것이지 병원에 가거나 약을 먹으면 믿음이 없는 것이다.
이렇게 되니까 어떤 일이 벌어지느냐 하면, 방언을 못해도 방언을 할 수 있는 척하고, 몸이 아플 때 병원에 갔어도 안 간 척하고,
또는 낫지 않았는데도 나았다고 간증을 해야 하는 일들이 벌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만약 병원에 가는 것이 믿음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러면 기독교인은 의사나 간호사나 약사가 되면 안 되는 것입니까?
이러한 발상은 뜨거운 믿음이나 뜨거운 행위가 아니라 어리석은 믿음, 우둔한 행위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지금까지 차가운 믿음, 차가운 행위를 너무나도 도외시해 왔습니다.
자, 생각해 보십시오.
눈앞에 전기세 고지서가 있습니다. 돈도 충분히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예, 돈을 내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러지 않고 전기세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무조건 기도만 한다면 그것이 믿음이 좋은 것입니까?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신학생이 시험기간이 다가오고 있는데 시험공부는 하지 않고 기도만 했다고 해요.
그러고는 이제 시험을 치는데 공부를 안 했으니 문제를 풀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답안지에 이렇게 썼다고 해요.
“하나님은 이 모든 문제의 답을 아십니다.”
그랬더니 며칠 뒤에 답안지를 나누어 주는데,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백점, 너는 빵점.”
여러분, 기도가 공부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에 공부는 안 해도 기도만 하면 된다고 한다면, 지금도 열심히 공부하고 연구하고 있는 신학생이나 신학자들은 다 믿음이
부족해서입니까?
가끔 보면 성경에 나와 있지 않은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그러면 성경에도 없는데 어떻게 아느냐고 물으면 간혹 이렇게 대답합니다.
“성경에 나와 있지 않아도 기도하면 다 알게 된다. 주님이 다 알게 해 주신다.”
자,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들은 그럼 믿음이 좋은 것입니까?
제가 보기에 그것은 믿음이 좋은 것이 아니라 성경 공부를 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의 핑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는 척은 하고 싶은데 성경 읽기는 귀찮거든요.
그러나 당연한 말이지만 이는 대단히 바람직하지 못한 신앙적 자세입니다.
아무리 좋은 음식이 눈앞에 놓여 있다 하더라도 이를 직접 먹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지 않습니까?
학교 공부도 그렇잖아요.
아무리 좋은 참고서나 문제집을 사다가 집에 쌓아 놓고 있어 봤자 실력이 늘지는 않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생명의 말씀이신 성경이 눈앞에 있다 하더라도 그저 무슨 제사를 지내듯이 성경을 앞에 두고 기도만 해 봤자 말씀을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깨달을 수 있습니까?
예, 그렇죠.
실제로 성경을 펴서 읽어야만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어떤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사람을 만났을 때에는 어떻습니까?
물론 우리가 기도를 해 줄 수 있겠지요.
하지만 실질적인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고 우리가 그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야고보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야고보서 2장 14절~17절
“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그 사람이 지금 목이 말라 죽어가고 있습니다.
나에게는 물이 있습니다.
그래도 그냥 기도만 해 줍니까?
그럴 때에는 그 사람의 머리에 손을 얹고 백 마디, 천 마디 방언기도를 해 주는 것보다 당장 내게 있는 물 한 잔을 주는 것이 더
필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 눈앞에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수영에 자신이 있다면 당장이라도 뛰어들 수 있겠지만, 그렇지 못하더라도 손을 뻗어 잡아 주거나, 끈이나 주위에 도움이 될 만한
것을 던져 준다거나, 아니면 주위에 큰 소리로 도움을 구한다거나 하는 무슨 구체적인 행위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일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오, 주여……”
하고 기도만 한다?
그게 뜨거운 믿음, 뜨거운 행함입니까?
이는 그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죽게 만드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물론 눈앞에 홍해가 가로막혀 있어 인간적인 힘으로는 아무런 방법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어떡하겠습니까?
기도를 하든 금식을 하든 해야 할 것 아니에요.
하지만 성경에 보시면 믿음의 선배들이 그저 앉아서 기도만 하는 경우는 흔하지 않습니다.
모세는 가만히 앉아서 기도만 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을 직접 이끌고 나아가지 않았습니까?
여호수아는 가만히 앉아서 기도만 하지 않았습니다.
강하고 담대하게 하나님을 의지하여 요단강을 건너 마침내 가나안 땅을 차지하지 않았습니까.
다윗은 골리앗 앞에서 가만히 기도만 하지 않았습니다.
만군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가 승리하지 않았습니까?
이처럼 성경은 우리에게 실천적인 행함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저 분위기에 휩쓸려서 흥분하고, 기분에 따라
“불로, 불로, 불로!”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를 아무리 외쳐 봤자 그것은 뜨거운 믿음이 아니라 즉흥적이고 감정적인 믿음, 그냥 한 번 해 본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요.
그런 순간적인 감정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라지고 맙니다.
그러나 우리가 말씀을 공부하고 깨닫는 믿음은 크나큰 시험도 능히 이길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한편으로 미지근한 행함은 어떻습니까?
그저 어쩌다가 일요일만 되면 교회에 갔다가 예배만 드리고 오고는, 그야말로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밋밋한 신앙생활을
합니다.
무교라고 하면 허전하고, 기독교인이라고 하기에는 찝찝합니다.
시간은 있는데 봉사도 하기 싫습니다.
경제적인 여유도 있는데 물질로 섬기기보다는 그냥 교회에 가면 주머니에 있는 것으로 대충 바칩니다.
기도도 안 하고, 성경은 언제 펼쳐 봤는지도 모릅니다.
노아나 모세나 아브라함이 누가 먼저이고 나중인지도 헷갈립니다.
이게 뭐라고요?
예, 바로 미지근한 행함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것, 오죽하면 토해 버린다고까지 말씀하시잖아요.
여러분, 우리는 뜨거운 행함과 차가운 행함, 신앙적 행함과 실천적 행함을 갖추어야 합니다.
이는 마치 창과 방패와도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한쪽만 가지고는 이길 수 없지 않겠습니까?
이제 우리는 주님에 대한 강한 믿음을 가짐으로써, 열정적인 뜨거운 행함과 냉철한 차가운 행함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진정한 믿음의 용사로 거듭나서 모든 싸움에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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