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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요한계시록 순수강해 34번째 시간으로서 “감았던 눈, 떠야할 눈”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지난 주에 이어서 빌라델비아 교회로 보내지는 편지에 대해서 살펴보는 세 번째 시간입니다.
우선 본문 중에서 10절~12절까지 세 구절을 잠깐 정리할까요?
10절 내용은 인내하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빌라델비아 교회 사람들이 지켰기 때문에 주님께서도 너희를 지켜 장차 이 세상에 닥칠
고난을 당하지 않도록 해주겠다.
11절은 주님께서 속히 오실 것이니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너희가 가지고 있는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마지막으로 12절에서 보면 승리자에게는 하나님 성전에서 다시는 나가지 않도록 기둥으로 삼을 것이며, 거기에는 하나님의 이름과 새
예루살렘의 이름, 그리고 주님의 새 이름을 기록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읽을 때, 그것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에 대해서 더욱 구체적으로 알려고 할 경우, 그 표현방법을 반대로
바꾸어 보면 더 이해하기 쉬워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럼 위 내용, 10절부터 12절까지의 본문에 있어서 그 말씀의 의미를 유지하면서 반대표현으로 바꾸면 어떻게 될까요.
이를 알기 쉽게 하기 위해서 본문과 반대표현을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본문 10절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이에 대한 반대표현은,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면 내가 또한 너를 지키지 아니하여 시험의 때를 면하지 못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다음으로 본문 11절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이에 대한 반대표현은,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놓아버리면, 다른 사람이 네 면류관을 빼앗게 되리라”
마지막으로 본문 12절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이에 대한 반대표현은,
“이기지 못하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의 기둥이 되지 못하게 하리니, 그가 분명 다시 나가게 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지 아니하리라”
어떻습니까.
본문을 그대로 읽게 되면 참으로 은혜로운 말씀입니다만, 이 표현을 반대로 하게 되면 그 내용은 그대로인데 무서운 경고의 말씀이라는
사실이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습니까.
계시록 오늘 본문의 핵심 내용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다루어 보기로 하고, 이번 시간은 이 본문 내용에 들어가기에 앞서서 잠시
성경 말씀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서 확인을 하는 시간을 가져볼까 합니다.
지금도 적지 않은 목회자나 신학자들이 말하기를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고 하는 주장을 많이 합니다.
한 번 예수님을 믿게 되면 그 다음에는 죄를 짓는다 해도 그 구원이 취소되는 일은 없다는 것이에요.
하지만 성경에 그런 식으로 기록된 말씀이 있습니까.
예를 들어서 바울의 고백을 보세요.
고린도전서 9장 27절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사실 말이야 바른 말이지요.
한 번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을 한다거나, 아니면 세례를 한 번 받으면 이제 구원을 받은 것이니까 그 구원은 절대로 취소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마음 같아서는 저도 그렇게 믿고 싶어요.
아마도 바울도 저와 비슷한 심정 아니었을까 합니다.
누구는 편안하고 싶어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바울도 잘 알고 있었겠지요.
고린도후서 11장 23절에서 27절에 보면 바울이 얼마나 고생을 하면서 주님의 사역을 감당했는지 자세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번 주님을 믿으면 이제 그 구원이 취소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바울은 왜 버림을 받을까 두려워한 것입니까.
지금 이 시대에 구원의 취소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보다 바울의 믿음이 부족해서입니까.
이른바 이단 사이비라고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 사람들의 글을 읽어 보기도 하고, 그리고 대화도 몇 번 나누어 보기도
했습니다만, 여러분께서는 그런 곳에 빠지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누구는 이를 두고 영적인 문제다, 마귀 사탄 때문이다, 라고 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만,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이른바 이단 사이비 집단에 빠지는 경우로 두 가지를 꼽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성경에 대한 게으름과 또 하나는 독해력 부족 때문이라고 단언할 수 있어요.
성경에 대한 게으름이라고 한다는 것은 성경을 읽지 않아요.
정답은 분명히 성경에 나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읽지 않고 누가 그것에 대해서 엉터리로 설명해 주면 그걸 곧이곧대로 믿어버리는
것이지요.
둘째로 독해력 부족이라는 것은 성경에 기록된 문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데에서 비롯됩니다.
성경은 전혀 그런 내용이 아닌데도 독해력 부족으로 자신들의 교주를 메시야다 재림예수다 라는 식으로 이해해버리는 경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여기서 한 가지 안타까운 말씀을 드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이와 같은 일들이 바로 복음주의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우리 기존 교회에서도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지요.
대표적인 주장이 바로 앞서 말씀드린 것과 같이 한 번 구원을 받으면 그 구원이 취소되는 경우가 없다는 논리입니다.
이는 칼빈의 사상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뭐, 여기서 제가 칼빈의 튤립이다, 성도의 견인이다 하는
어려운 말씀을 굳이 드리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장로교의 창시자 칼빈, 감리교는 요한 웨슬리, 침례교는 존 스미스가 설립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외에도 종교혁명 이후 훌륭한 신학자 목회자들은 많이 나왔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얼마나 훌륭한 목사님들이 많이 계십니까.
이 방송을 들으시는 분들 중에서도 제2의 칼빈, 제2의 웨슬리, 제2의 존 스미스, 그리고 제2의 한경직 목사님, 제2의 옥한흠
목사님, 제2의 조용기 목사님 같은 훌륭한 신학자나 목회자 분들이 많이 나오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뭐냐 하면, 성경은 하나라는 점입니다.
더 이상의 성경은 없어요.
물론 다양한 종교서적은 필요하겠지요.
하지만 아무리 유명한 신학자나 목회자가 쓴 책이라 하더라도 성경에서 벗어나게 된다면 이는 아무런 가치가 없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 구원의 취소에 대한 점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더 심도 있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만, 그 외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볼까요.
예를 들어서 여러분도 많이 들어 보셨을 한 영혼의 가치에 대해서는 어떻습니까.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라는 말씀, 여러분도 들어 보셨겠지요?
그렇다면 이 말씀은 어느 구절에서 비롯된 주장인지 혹시 아십니까.
이는 마태복음 16장 26절 말씀에 그 근거가 있다고 해요.
마태복음 16장 26절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자, 여러분께서는 이 말씀이 하나님께서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고 계시다는 뜻으로 이해가 되십니까.
제가 예전에 한국에서 일본어 시험반을 가르치고 있을 때 독해에 대한 책도 쓰고 그랬습니다만, 이 마태복음 말씀을 그렇게 해석한다는
것은 이는 그야말로 독해력 부족입니다.
그런 식으로 독해문제를 풀면 정답을 맞출 수가 없어요.
다시 한 번 볼까요?
마태복음 16장 26절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신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있어서 자신의 목숨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 천하를 얻으려다가 자신의 목숨을 잃고, 자신의 구원을 잃어버리게 되면 아무런 소용이 없지 않겠는가.
그러니까 세상 것에 대해서 욕심을 내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자신의 목숨, 자신의 구원 문제를 더욱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는
말씀이라고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말이 나온 김에 하나 더 할까요.
이 또한 제가 어느 교회 설교시간에 직접 들은 말씀인데, 여러분께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왜 선택하셨다고 배우셨습니까.
그 목사님은 신명기 7장 7절을 말씀하십니다.
신명기 7장 7절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이는 분명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신 말씀입니다만, 그 목사님께서는 이 구절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신 이유라고
하시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택하신 이유는 모든 민족 중에서 그 수효가 가장 적기 때문이라는 것이에요.
그 목사님은 이 점을 얼마나 강조하고 싶으셨는지, 그 설교 때만 보아도 한 세 번은 이 말씀을 하신 것 같아요.
여러분께서는 이해가 되십니까.
이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니지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신 이유는 숫자가 많아서가 아니야. 오히려 너희는 숫자가 적어. 그러니까 이스라엘을 택하신 이유는 숫자
때문이 아니야.”
이는 그런 뜻이잖아요.
사실 지금도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중에서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을 무슨 대단히 의로운 민족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또한
역시 성경을 읽지 않는 게으름 때문에 생겨난 오해입니다.
성경에 보십시오. 이스라엘 자손들이 출애굽 이후에도 하나님께 얼마나 많은 잘못들을 되풀이합니까.
그리고 또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신명기 9장 4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신 후에 네가 심중에 이르기를 내 공의로움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나를 이 땅으로
인도하여 들여서 그것을 차지하게 하셨다 하지 말라 이 민족들이 악함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니라”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에 사는 민족들을 몰아내고 그 땅을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주실 것인데, 이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공의롭기 때문이
아니라 가나안 민족들이 악하기 때문이라고 하세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많은 민족 중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구원하셨지요. 그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그 수효가 많지도 않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공의롭지도 못한 이스라엘 자손들을 하나님께서는 왜 택하셨을까요.
이는 7절 이후 말씀을 보시면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좀 길지만 읽어 드리겠습니다.
신명기 7장 7절~10절
“7.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8.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또는 너희의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
9.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의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
10.그를 미워하는 자에게는 당장에 보응하여 멸하시나니 여호와는 자기를 미워하는 자에게 지체하지 아니하시고 당장에 그에게
보응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구원하신 이유는 그들이 잘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세요.
그러면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 언약을 이행하시고 인애를 베푸신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잘한 것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누가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켰기 때문에 그들을
구원하신 것일까요.
이에 대한 답 역시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그 주인공은 바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었던 것입니다.
창세기 26장 3절~5절
“3.이 땅에 거류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내가 네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
4.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5.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라 하시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돌아보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이유는 그 수효가 많아서도 아니요, 그들의 믿음이 좋아서도 아닙니다.
오직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순종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켰기 때문에, 그의 후손인 이스라엘 자손들을 구원하셨다고 하나님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에 나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자손을 구원하신 이유가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적어서 구원을 했다? 이는 완전히
다른 해석이 되고 마는 것이지요.
여러분, 이단 사이비가 별것입니까.
기존 교회에 있어서도 이처럼 자기 멋대로 해석을 하게 되고, 그리고 성도들은 그저 목사님이 무슨 말을 하든 하나님 말씀처럼
받아들이게 되면 그게 이단 사이비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사실 이단 사이비 집단들이 이렇게 커져버린 것은 기존 교회의 책임이 너무나도 큽니다.
요즘도 각 교회에 보면 무엇을 주제로 한 집회들이 많습니까.
예,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가 중요하다, 기도로 깨어나라 하면서 여러가지 다양한 기도 집회나 부흥회 같은 것을 많이 보게 됩니다.
기도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특별히 작금의 한국 교회를 보면 너무나도 기도에만 치우친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듭니다.
여러분, 기도하고 응답 받고 할렐루야 하게 되면, 그것이 우리의 신앙입니까.
사실 기도는 응용입니다. 기초가 아니에요.
그러면, 신앙에 있어서 기초는 무엇입니까.
예,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유일하고도 완전하여 오류가 없는 성경말씀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도 제대로 모른 채 무조건 기도만 하라고 하는 것은, 이는 자동차로 본다면 무엇이 가속 페달이고 무엇이 브레이크인지도
가르쳐주지 않은 채 무조건 차를 운전해보라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사고가 날 수밖에 없어요.
뿐만 아니라 이렇게 되니 성도들은 말씀에 대해서 갈망을 느끼게 됩니다.
말씀을 배우고 싶어해요.
그런데 기존 교회에서는 성경을 가르치는 대신에 그저 기도다 방언이다 은사다 하면서 정작 말씀을 가르치는 데에는 소홀해요.
그러는 동안에 이단 사이비 집단들은 성경을 가르칩니다.
물론 엉터리로 가르치죠.
결국 따지고 보면 자신들의 교주가 하나님이다 재림예수다 그리스도다 구원자다 이긴자다 보혜사다 참아버지다 어머니다 하는 논리
아닙니까.
하지만 기존 교회에서 말씀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예, 정말로 말씀을 배우고 싶어하는 알곡들이 기존 교회에서 그와 같은 이단 사이비 집단으로 빠져나가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시편 1편에서는 복 있는 사람과 악인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잖아요.
그렇다면 복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라고 합니까.
낮이나 밤이나 그저 기도만 하는 사람이라고 하나요?
시편 1편 1절~2절
“1.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렇습니다. 여호와의 율법,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가 복이 있는 자라고 해요.
그런데 정작 교회에서는 묵상해야 할 성경말씀을 주지 않아요.
설교시간에는 세상 이야기나 정치 이야기, 또는 자신의 세상적인 경험담이나 무용담을 늘어놔요.
그러니 말씀은 아는 것이 없고 그저 맨날 ‘주시옵소서’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만 했다면 무엇을 묵상할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어떤 교회는 무슨 귀신이나 마귀 얘기를 많이 하는 곳도 있다고 합니다.
물론 악한 영에 대해서도 알아야 하는 것은 맞아요.
하지만 그게 핵심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7장 3절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우리는 마귀에 대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진정으로 알아야 할 분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서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 동안 기도만이 믿음이라고 생각했던 풍조가 있다면 이제 감았던 눈을 뜨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 눈을 들어 성경말씀으로 돌려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알고 말씀을 묵상해야 진정으로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를 알게 되는 것이지, 말씀도 제대로 모르는 상태에서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를 어떻게 알 수가 있겠습니까.
시편 123편에서 시편 기자는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시편 123편 1절
“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감고 있던 눈을 뜨고, 우리의 눈을 주님께 향해야 합니다.
지금도 살아 계셔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 성경말씀으로 향해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알면 흔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시험을 이겨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4장에서도 예수님께서 마귀 사탄을 물리치실 때에 말씀으로 물리치시지 않았습니까.
말씀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 말씀 안에 주님께서 계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감았던 눈을 뜨고 성경말씀을 알아감으로 말미암아 진정한 주님을 만나고, 주님께 순종하는 삶, 복 있는 사람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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