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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요한계시록 순수강해 33번째 시간으로서 “순종한 자에게 열리는 문”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지난 주에 이어서 빌라델비아 교회로 보내지는 편지에 대해서 살펴보는 두 번째 시간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주님에 대해서 공부를 했었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시면 그와 같은 주님께서 빌라델비아 교회를 향해 말씀하시기를, 그들 앞에 열린 문을 두셨다고 해요.
이 열린 문에 대해서는 신학자들마다 무슨 구원의 문이다 선교의 문이다 또는 기회의 문이다 등 여러 가지 해석이 분분합니다만, 이는
단순히 그저 느낌이나 그럴 듯한 생각만으로 풀게 되면 자칫 잘못 이해하게 되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잠시 후에 말씀 드리도록 하고, 그 다음을 볼게요.
주님께서 이와 같이 열린 문을 두셨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빌라델비아 교회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도 주님의 말씀을 지키며 주님을
배반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말하자면 주님께서 그들 빌라델비아 교회 앞에 열린 문을 두신 이유는, 그들이 작은 능력을 가지고도 주님께 순종한 것에 대한
포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열린 문을 두심으로 인해서 어떠한 일이 일어나게 되었는지를 알아보아야 하겠지요.
그 점에 대한 내용이 바로 다음 구절입니다.
9절을 다시 한 번 보실까요?
요한계시록 3장 9절
“보라 사탄의 회당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아니하고 거짓말 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그들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이 말씀에 의하면 사탄의 회당, 말하자면 사탄의 무리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무리에는 어떤 사람들이 있냐 하면 자칭
유대인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거짓말하는 자들이라고 해요.
그들 중의 몇몇이 너희들 앞에 와서 절을 하게 될 테니 이를 보고 주님이 너희들을 사랑하는 줄 알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자, 이 구절만 해도 정보량이 많기 때문에 세부적으로 나누어서 살펴보도록 하지요.
먼저 사탄의 회당, 그러니까 사탄의 무리라고 하는 표현에 대해서 보겠습니다.
세상에는 좋은 사람, 착한 사람들도 참 많은 반면에, 안타깝게도 나쁜 사람들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는 간혹 그런 나쁜 사람들을 가리켜서 함부로 마귀나 사탄이라고 할 때가 있습니다만, 사실 이는 옳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마귀나 사탄은 일반적으로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고, 그와 같이 나쁜 짓을 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마귀나 사탄이라서가
아니라, 마귀나 사탄의 유혹에 넘어갔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탄에게 넘어간 사람들이 어떤 이들이냐 하면 자칭 유대인이라고 하지만 그렇지 않고 거짓말 하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유대인이라고 하는 말씀에 대해서 확인을 하고 넘어가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알기로 구약에 등장하는 유대인에 대해서는 예외가 없습니다.
육적으로 말 그대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유대인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신약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족보상으로 보았을 때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유대인이라고 하겠지만 특별히 신약에 있어서 이는 그리 중요하지 않아요.
로마서 2장 28절~29절
“28.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29.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갈라디아서 3장 7절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이와 같은 바울사도의 서신들은 실로 혁명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를 증명하는 것은 뭐가 있을까요.
예를 들어서 무슨 계약서 같은 거요?
사실 마음만 먹으면 그런 종이는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것이잖아요.
하지만 혈육이라고 하는 것은 절대적입니다.
아무리 나중에 사이가 틀어져서 남남이나 원수처럼 지낸다 하더라도 그 육신에 새겨진 DNA는 바꿀 수가 없어요.
마치 그와 같은 것처럼 유대인이라고 하는 근거는 무엇보다 아브라함의 자손, 더 구체적으로는 아브라함에서 이삭, 그리고 야곱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그 혈통이 바로 유대인임을 나타내는 절대적인 증거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 더해서 남성은 할례를 받아야지만 진정한 유대인 남성으로 인정을 받았던 것이잖아요.
그러나 바울은 이를 정면으로 부인합니다. 혈육에 있어서의 유대인? 족보상의 유대인? 할례? 그런 것 다 필요 없어.
우리가 믿기만 하면 그것으로 진정한 유대인인 거야.
바울은 이렇게 못을 박아버린 것이에요. 이 얼마나 놀라운 선언입니까.
하지만 조금 거슬러 올라가면 사실 이와 같은 주장을 한 것은 바울이 처음은 아니지요.
회개를 위해 세례 요한에게 몰려온 사람들에게 그는 뭐라고 말합니까.
누가복음 3장 8절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당시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대단히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세례 요한은 뭐라고 합니까.
자신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자부심? 그런 건 아무런 소용 없어.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아무런 가치 없는 돌멩이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실 수 있단 말이야.
그래서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렇지요.
구약에서는 아무런 가치도 인정받지 못했던 이방인들, 나아가 우리와 같은 외국인들도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함으로
말미암아 진정한 유대인,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 9절에 등장하는 이른바 자칭 유대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스스로를 혈육이나 족보상의 유대인이라고
주장했는지, 아니면 자신들도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신앙적으로 진정한 유대인이라고 주장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어찌되었든 그것은
거짓말이라고 하잖아요.
이렇게 본다면 이들은 정말 형편없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들 중 몇몇이 빌라델비아 교회 사람들에게 와서 그들의 발 앞에 절을 하게 만들겠다고 하시는데, 이로 인해서
주님이 빌라델비아 교회를 사랑하는 줄 알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보았을 때 그들, 그러니까 자칭 유대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빌라델비아 교회 사람들에게 있어서 방해가 되는
사람들, 훼방하는 사람들 또는 더 나아가 대적했던 사람들이 아닐까 합니다.
그런데 그들 중 몇몇이 와서는 그 발 앞에 절하도록 만들겠다고 하시는데, 현실적으로 그와 같은 일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고 한다면, 주님께서 설마 스스로의 사랑을 나타내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겠습니까.
이렇게 본다면 세상적으로 보았을 때 자칭 유대인이라고 하는 거짓말 하는 사탄의 무리들은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있어서 대단히 불편한
존재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먼저 빌라델비아 교회 쪽으로 와서 절을 하며 굴복한다는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이 편지를 빌라델비아 교회에서 받아보았을 때 이 부분에 대해서 “할렐루야”를 외친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어쩌면 그들 중에는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라고 미심쩍어 했던 이들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말이에요. 사실 성경을 살펴본다면 그 내용 전체가 그야말로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로 가득 차 있는 것이 아닐까요.
벌써 창세기 1장 1절부터 놀랍지 않습니까.
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세상적인 학문으로 본다면 우주 창조와 인류의 역사는 쉽게 말해서 모두가 다 ‘어쩌다가 우연히’입니다.
우주의 시작이 빅뱅, 말하자면 대폭발로 인해서 생겨났다고 하는데, 여기에 무슨 의미, 또는 의지를 부여하는 사람을 본 적은
없습니다.
그저 어쩌다가 우연히 빅뱅이 발생해서 우주가 생겨났다는 것이에요.
그리고 어쩌다가 우연히 별들이 생겨나고 그리고 지구도 생겨나서, 역시 어쩌다가 우연히 생물들이 태어났습니다.
그러다가 역시 어쩌다가 우연히 유전자의 복사 과정에서 에러가 발생하는 돌연변이로 인해서, 어쩌다가 우연히 파충류도 생겨나고,
어쩌다가 우연히 조류나 포유류도 생겨나고, 그리고 어쩌다가 우연히, 예, 사람도 생겨났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어떻게 기록합니까.
예, 그렇죠.
하나님께서 분명히 의지를 가지고 천하만물을 창조하시고는, 마지막으로 우리 사람 또한 하나님께서 분명한 의지와 목적을 가지시고
하나님의 형상 대로 우리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벌써 이것부터가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을 것을 말씀하시자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그는 어떻게 했습니까.
창세기 17장 17절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하고”
그리고 그의 아내 사라도 역시 그렇게 생각하지요.
창세기 18장 12절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
이왕 아들을 주실 거면 좀 일찍 주시던가 하시지, 아브라함의 나이 100세에 사라 나이 90세인 상황에서 아들을 주신다니,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 아니겠습니까.
열왕기하 6장에 의하면 아람 군대가 쳐들어와서 사마리아 성을 포위합니다.
그 기간이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였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만 상당히 오랫동안 계속된 것 같아요.
사람들이 바깥으로 나오지 못하게 되자 성 안에서는 식량들이 떨어져 굶주리게 됩니다.
그렇게 되니까 정말 입에 담을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해요.
이제 언제 폭동이 일어나거나 아니면 멸망해도 이상하지 않을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데, 열왕기하 7장 1절에 의하면 당대의 선지자
엘리사가 놀라운 예언을 합니다.
열왕기하 7장 1절
“엘리사가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일 이맘때에 사마리아 성문에서 고운 밀가루 한 스아를 한 세겔로
매매하고 보리 두 스아를 한 세겔로 매매하리라 하셨느니라”
엘리사가 말하기를 내일 이맘때에 환난이 끝나고 모든 식량이 정상적으로 거래된다는 거예요.
이 놀랍고도 기쁜 예언을 했을 때, 그렇다면 모든 사람들이 다 이 말을 믿었을까요?
열왕기하 7장 2절
“그 때에 왕이 그의 손에 의지하는 자 곧 한 장관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 하더라 엘리사가 이르되 네가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 하니라”
‘왕이 그의 손에 의지하는 자’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부축해주는 하인 정도가 아닙니다.
여기 보면 장관이라고 하잖아요.
그러니 상당한 학식이 있는 당대 최고 엘리트 중 한 사람이었겠지요.
그런 그가 듣기에도 너무나 믿기 어려운 말입니다.
다음 달이나 하물며 다음 주도 아니고 바로 내일 이맘때에 이 아비규환이라고도 할 수 있는 상황이 정상화가 된다니 어떻게 믿을 수가
있겠어요.
이 장관의 말처럼 그야말로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라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결과는 어땠습니까.
아브라함의 나이 100세 때 이삭이 안 태어났습니까. 아니에요. 태어났어요.
창세기 21장 5절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이 그에게 태어날 때에 백 세라”
그리고 열왕기하 7장 1절에서 예언된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의 예언, 모든 환난이 해소되어 식량 거래가 정상으로 되돌아 올 것이라는
예언은 같은 장 16절에서 마침내 현실이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를 믿지 않았던 왕의 최측근에 대한 예언, 그가 믿지 않았기 때문에 눈으로는 식량이 정상적으로 거래된다는 그 예언이
이루어지는 것은 보겠으나 정작 그 식량은 먹지 못할 것이라는 예언도 그대로 성취되고 마는 것이지요.
출애굽기의 말씀을 보세요.
애굽에 일어난 열 가지 재앙들, 홍해를 가르고 이스라엘 자손들을 모두 건너게 하시고, 그에 반해 애굽 최정예군대들을 모두 수장시켜
버리신 사건들,
바위에서 물을 내시고 무려 40년 동안 최소 수 십 만에 달하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광야에서 만나로 먹이신
일들.
지난 시간에도 알아보았던 것처럼 어딘지도 모르는 이방 땅에서 끌려온 한낱 청년 노예 요셉이 당시 최강국이었던 애굽의 총리가 된
일,
가족에게서 조차도 제대로 대우를 받지 못했던 양치기 집안 막내아들 다윗이 블레셋 용사 골리앗을 물리쳤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왕위에 오르게 되지 않았습니까.
이와 같은 놀라운 역사는 신약으로도 이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물을 포도주로 바꾸셨고 물 위를 걸으셨습니다.
마태복음 11장 5절 말씀처럼 맹인이 보고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습니다.
못 듣는 자들의 귀가 열리며 죽은 자가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와 같은 모든 일들은 말만 들으면 모두가 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결과적으로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면 모든 것이 그 말씀대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세상적으로 생각해보세요. 이를 믿는 것이 지혜입니까. 아니면 안 믿는 것이 지혜입니까.
당연히 믿지 않는 것이 지혜이지요.
이 중에서 지금 당장 우리 눈앞에 일어난다고 한다면, 세상적으로 보아서 어떤 것이 믿어지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고린도전서 1장 21절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그렇습니다. 이 모든 일들을 세상적인 지혜로는 알 수가 없어요.
그래서 우리에게 무엇을 주셨습니까.
그렇지요. 바로 성경말씀, 오류가 없고 모순이 없는 유일하고도 완전한 하나님 말씀이신 성경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에 기록된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의 가장 큰 말씀은 무엇입니까.
예,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해지고 구원을 받아,
마침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이것이야말로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아니겠습니까.
성경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태어나는 것보다 수 천년 전에, 그것도 수 천 킬로나 떨어진 먼 나라에서 누군가가 죽었는데, 그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 사람이 내 죄를 위해서 죽었다고 하는 것을 믿으라는 거예요.
여러분, 이것을 믿는 것이 과연 지혜로운 것입니까. 아니면 미련한 것입니까.
사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정신이 온전하다면 이런 주장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을 말씀하십니다.
고린도전서 1장 18절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그렇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믿음을 미련하다고 합니다. 차라리 세상 지식이나 경험을 의지하라고 해요.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가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우리가 의지할 유일하고도 완전한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로서는 최고의 교육을 받았던 바울도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고린도전서 2장 2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그렇지요. 자신이 지금까지 받아왔던 그 어떤 지식이나 지혜나 가르침보다도 예수님의 십자가가 더욱 값지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미련하다고 하더라도 나는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알기로 작정하였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중국 최고의 병법서로 알려진 손자병법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고 해요.
“백 번 싸워서 백 번을 이긴다 하더라도 그것이 최고의 방법은 아니다. 최상의 방법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일이다.”라는 것이에요.
그렇겠죠. 아무리 적들과 싸워서 이긴다 하더라도 아군에게 어느 정도는 피해가 있을 수 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최고의 승리는 뭐냐 하면 아군에게 피해가 전혀 발생하지 않고 이기는 것, 즉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상의 승리라고
하는 것이겠지요.
앞서 빌라델비아 교회 사람들에게는 그 때까지 대적이었던 자칭 유대인들이 와서 그 발 앞에 절을 하게 만든다고 하십니다.
이는 그야말로 주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은 승리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그들이 그 승리를 위해 한 것이 무엇입니까.
대적들을 향해 공격을 했습니까.
맞붙어서 피 터지게 싸웠어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 사람들이 한 것이라고는 작은 능력을 가지고도 주님의 말씀에 순종했던 것, 그것이 전부였던 것이지요.
어찌 보면 그것은 승리와 전혀 상관없는 일처럼 보일지도 모릅니다.
세상 사람들은 말하지요.
아니, 이봐. 적들에게 승리를 하려면 적을 공격해야 하잖아. 왜 쓸데없이 교회 일을 해?
이것이 바로 세상과 신앙의 차이, 미련함과 구원의 차이 아니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세상의 방법대로 살라고 합니다.
그러나 구원 받는 성도들은 하나님 방법대로 살아감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승리를 얻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그 질문을 던져보아야 하겠지요?
예.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 어떻게 해서 이런 승리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일까요.
그 질문에 대한 정답은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에 대한 주인공 중 하나인, 바로 다윗이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다윗은 블레셋 용사 골리앗에게 다음과 같이 외칩니다.
사무엘상 17장 45절~47절
“45.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46.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47.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한 쪽은 블레셋 군대의 용사 골리앗, 다른 한 쪽은 미성년자인 양치기 소년입니다.
지금으로 본다면 한 쪽은 최정예 특수부대 요원, 그 중에서도 대장이고, 다른 한 쪽은 그냥 시골 동네 고등학생이에요.
이 두 사람이 맞붙는다고 한다면 승부는 너무나도 뻔한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당당하게 말합니다.
전쟁은 칼과 창에 있지 않고 여호와께 속한 것이라고 선언하는 것이지요.
영어에 있어서 ‘지배자’를 뜻하는 단어 중 흥미로운 말이 있는데 이는 바로 룰러(ruler)라는 단어입니다.
여기서 룰(rule)이라고 하는 뜻 중에는 ‘규칙’이라는 의미가 있어요.
그러니까 룰러(ruler)라고 하면 ‘규칙을 만드는 자’라고 해석할 수도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룰러(ruler)라고 하면 ‘규칙을 만드는 자’ 곧 지배자라고 한다는 뜻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스포츠도 마찬가지 아니에요?
승패는 누가 정합니까. 상대방 선수가 정해요? 아니에요.
규칙을 만드는 사람들, 경기를 평가하는 심판이 정합니다.
만왕의 왕 되신 하나님은 규칙을 만드시는 분이세요.
상대방이 아무리 자신이 이겼다고 주장을 해도 전쟁의 규칙을 만드시는 하나님, 승리를 결정하시는 하나님이 인정해 주셔야지만 진정한
승리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승리를 위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내 생각대로? 세상 경험대로 해야 하나요?
아닙니다. 모든 규칙을 만드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나아갈 때에 진정한 승리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고린도전서 1장 25절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빌라델비아 교회 사람들은 세상적인 방법으로 사탄의 무리들을 대적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미련하다는 소리를 듣는 한이 있더라도 그들은 하나님의 지혜를 의지하고 하나님의 방법을 의지했던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한 목소리로 그랬을 것입니다.
아니, 어떻게 그런 방법으로 이길 수 있단 말이야.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
그러나 끝까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았던 그들에게 주님께서는 열린 문을 주셨다고 하십니다.
이 열린 문은 빌라델비아 교회가 대적자들 앞에서 하나님께 인정받는, 다름 아닌 승리의 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주님께서는 열린 문을 두심으로 말미암아 끝까지 주님을 믿고 주님을 의지하고 그리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에게, 싸우지
않았음에도 놀라운 승리를 안겨 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우리는 아무리 세상 사람들이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라고 하면서 의심을 강요하더라도, 더 이상 멸망으로 가는 세상 지혜나
경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구원으로 가는 예수님의 십자가, 주님의 유일하고도 완전한 성경말씀을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주님께서 열어 주시는 승리의 문으로 들어가, 주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승리의 면류관을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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