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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요한계시록 순수강해 31번째 시간으로서 “에덴의 비밀과 우리의 회복”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원죄에 대해서 그 동안 가려져 있던 부분을 이해하고 더 나아가 에덴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해서 죄와
죽음이 우리에게 들어오고, 그리고 마침내 이루어질 구원과 회복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원죄에 대한 결론부터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원죄에 대한 저의 결론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원죄'의 개념, 즉 아담의 죄가 무슨 생물학적 바이러스처럼 유전된다는 식의 주장은
성경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원죄의 본질은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에덴에서 추방된 요인과 생명의 근원 즉 생명나무로부터
분리된 상태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해가 없도록 하기 위해 미리 말씀을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먹은 것은 분명히 죄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분명한 불순종이라고 하는 죄인 것이지요.
지난 시간에 살펴본 것처럼 이 일로 인하여 첫째로 남자는 땀을 흘려 일을 해야 하게 되었고, 둘째로 여자는 해산하는 데에 고통을
더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셋째로 사망에 이르게 된 것이지요.
자, 이 세 가지에 대해서 우선 살펴 보겠습니다.
그들은 왜 이런 일을 당하게 되었을까요.
아니, 물론 죄를 지었기 때문이지요. 예, 그건 맞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순식간에 그렇게 된 것입니까.
성경은 여기에 대해서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3장 22절~24절
“22.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23.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24.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여기에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하지 못하도록 에덴에서 내보내시고는 그룹천사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서 지키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지키게 하셨습니까.
그렇죠.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여기서 잠깐 생각해볼까요.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하셨습니까.
예,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해서 그러지 못하도록 길을 막으셨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으로 본다면 생명 나무 열매를 따먹으면 영생을 할 수 있어요.
그렇다면 반대로 생명 나무 열매를 따먹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죠. 영생을 할 수 없게 되니까 사망을 하게 된다고 이해할 수 있잖아요.
그러니까 아담과 하와 만이 아니라 그들의 자손들이 모두 사망에 이르게 된 원인을 생명나무 열매를 먹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이해를 한다면, 무슨 선악과 안에 바이러스가 있어서, 그것이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했고, 나아가 자손들한테까지도 유전병처럼
전염되었다거나, 그것이 아니라면 공의로운 하나님께서는 분명 죄가 대물림되거나 하는 일이 없다고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아담과 하와의
죄 만은 자손들에게까지 이어진다고 하는 식의 근거 없는 예외를 적용할 필요가 없게 되는 것이지요.
또한 에덴은 어떤 곳이었습니까.
창세기 2장 9절에는 하나님께서 에덴에 각종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아담과 하와가 살아가기 위해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창세기 2장 10절 이하에 보시면 너무나도 아름다운 보석들로 가득 차 있었다는 사실도 알 수 있어요.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임무를 주시지요.
창세기 2장 15절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하나님께서는 그로 하여금 에덴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셨다고 하는데, 그렇다고 힘들게 노동을 시키신 것이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고 축복하신 내용을 보시면 더욱 잘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1장 28절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먹고 살기 위해서 힘들게 노동을 하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모든 생물들을 다스리라고 하신 것이지요.
그래서 그가 처음에 한 일이 무엇입니까.
예, 창세기 2장 20절에 의하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붙어주었다고 합니다.
이는 그야말로 철저한 관리자, 더욱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다스리는 자, 지배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에덴에서 내몰린 그가 해야 했던 것은 무엇입니까.
창세기 3장 23절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그렇습니다. 이제 그는 세상을 다스리는 자가 아니라 땅을 갈아야 하는 자, 지배자가 아니라 생산자 노동자가 된 것이지요.
말하자면 여름에도 넓은 직무실에 앉아 에어컨 바람 쐬면서 농작물 수확량의 보고를 받고 관리하며 명령하는 회장님이나 통치자가
아니라, 땡볕에서 거친 땅을 개간하고 씨를 뿌리며 바깥에서 일을 하는 처지가 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생명나무로 가는 길이 막혔기 때문에 그들은 때가 되면 사망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여자의 해산문제요?
아니, 생명나무 열매를 먹으면 죽지도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는데 해산의 고통이 문제겠습니까.
사실 알고 보면 모든 동물들이 힘들게 해산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웬만한 사람 몸집만 한 캥거루 같은 경우에는 새끼 크기가 3센티 정도밖에 안 돼요. 그러니 해산할 때 고통이
없겠지요.
그렇게 태어나서는 엄마 주머니까지 기어가게 되는데, 그 주머니 안에 젖이 있거든요.
그래서 거기서 클 때까지 젖을 먹으면서 자라게 됩니다.
그러면 꼭 주머니가 있는 동물만 그렇게 작게 태어나냐 하면, 100킬로가 넘는 자이언트 판다의 경우를 본다면, 엄마는 주머니도
없는데 새끼 크기는 100그램 정도라고 해요.
사람은 아기가 2000~3000그램 정도 하는 데에 비하면 대단히 작은 크기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에덴에 있었을 때에는, 음식이나 환경의 영향 등 어떤 요인인지는 모르지만, 여자도 훨씬 해산하기가 수월하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하겠지요.
이렇게 본다면 어떻습니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고 난 다음에 그들이 겪게 된 일들은 무슨 바이러스나 유전병, 또는 대물림 되는 저주가 아닌,
단순히 에덴에서 추방되었기 때문에 일어난 일들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내용을 알게 된다면 기존 전통적인 견해 입장에서 그 근거로 제시한 로마서 5장 말씀도 모두 이해가 돼요.
로마서 5장 12절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그러니까 아담과 하와로 인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말하자면 세상의 죄가 시작된 것이지요.
그리고 그 결과로 에덴에서 추방되어 생명 나무 열매도 먹을 수 없게 되었으니 사망도 닥치게 된 것입니다.
자, 그리고 다음 구절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짓게 되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기존 신학에서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었기 때문에 죄를 짓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주장에 대해서는 대단히 회의적입니다.
이 주장대로라면 아담과 하와가 아직 선악과를 먹기 전에는 죄를 지을 수 없어야 하잖아요.
하지만 아담과 하와가 불순종이라는 죄를 지은 것이 선악과를 먹기 전이었습니까. 아니면 먹고 난 다음이었습니까.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불순종이라고 하는 죄에 착수하게 된 시점이 언제입니까.
예, 그렇죠. 아직 선악과를 먹기 전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선악과를 먹는다고 하는 불순종의 죄를 짓지 않았습니까.
조금 어려운 말을 하자면요, 세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범죄를 직접 저지르지 않더라도 그 범죄를 예비하거나 공모하거나 착수할 때에도, 이미 그것도 범죄로서 우리나라에서도 처벌하고
있거든요.
범죄에 착수한다는 것은 아직까지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도 분명히 처벌을 받는 죄입니다.
그런데 지금 살펴본 것처럼 아담과 하와가 그 불순종이라고 하는 범죄에 착수한 것은 선악과를 먹기 전이었습니다.
만약에 사람들이 죄를 짓기 시작한 것이 이 선악과가 그 원인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죄를 짓게 되었을까요.
그 원인도 역시 에덴에서 쫓겨났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한 번 생각해 보시기를 원합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왜 죄를 짓습니까. 아니, 어떻게 하면 죄가 사라질 수 있겠습니까.
이 근본원인 중 하나는 바로 ‘결핍’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더 쉽게 말하자면 ‘부족함’ 때문이죠.
중국 춘추전국시대 때의 재상이었던 관중이라는 사람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곳간에 곡식이 가득 차야 예절을 알고, 입고 먹는 것이 풍족해야 영광과 부끄러움을 안다”고 했다고 해요.
사실 맞는 말이지요.
굶주리고 헐벗은 상황에서는 어떻게 남을 배려하거나 체면을 차릴 수가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죄의 원인 중 하나는 ‘부족함’에 있습니다.
돈이 없어서, 배가 고파서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기도 하는 것이 대표적이겠지요.
하지만 돈이 많고 풍요롭다고 해서 죄를 안 짓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을 보세요. 돈도 많고 권력도 많이 가진 사람이 죄를 안 짓습니까.
아니에요. 그렇지 않지요.
예를 들어서 아무리 가진 것이 많다고 해도 채워지지 않는 허무함이나 공허함 같은 것이 있는 경우는 어떻게 됩니까.
예, 음란이나 도박, 더 나아가 마약 같은 약물에 손을 대기도 하는 것이지요.
뿐만 아니라 부족함은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시기나 질투를 하기도 하고 이성이나 이웃 간에 있어서 다툼이 있는 것도, 가만히 보면 채워지지 않는 욕구, 욕심에 기인한 경우가
많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사람들은 넘치도록 많이 가지면 다투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 주변에 넘치도록 있는 것이 뭐예요? 예, 공기입니다.
공기 특별히 산소는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사실 돈이나 재산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것 아니겠어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혹시 여러분 주변에서 자기가 공기를 더 많이 가지려고 애 쓰거나 다투는 사람 보셨습니까.
아니면 공기를 자기 집에 쌓아 두려고 노력하는 사람을 보셨습니까.
아니에요.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왜요? 예, 가만히 있어도 차고 넘치거든요.
그냥 들이 마시면 얼마든지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어요.
그러니 공기 가지고 다툴 일도 없고 집에 쌓아 둘 필요도 없는 것이지요.
에덴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모든 것이 풍요로웠어요. 기를 쓰고 모아들이지 않아도 돼요.
지천에 널려 있는 것이 금은보화인데 괜히 그걸 집에 들여오면 집만 좁아지지 무엇하러 그걸 쓸어 담겠어요.
하지만 에덴에서 한 발자국 나오면 완전히 딴 세상입니다. 채워도 채워도 부족해요. 모자라요.
그러니 어떻게 됩니까.
예, 조금이라도 긁어 모으려고 애를 쓰고, 그것도 모자라서 다른 사람들의 것을 빼앗으려고 하는 것이지요.
사실 따시고 보면 동서고금, 빈부귀천,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떠나서 모든 사람들이 그래서 죄를 짓는 것 아니겠습니까.
로마서 3장 10절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그렇습니다. 의인은 없어요. 죄를 짓지 않고 스스로 구원 받을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이 모두가 다 사망에 이르게 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5장 18절~19절을 볼까요
로마서 5장 18절~19절
“18.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19.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그렇기 때문에 아담과 하와가 불순종이라고 하는 범죄를 저지르고 에덴에서 쫓겨남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죄를 짓게 되었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라고 하는 순종으로 말미암아 십자가의 능력으로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는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말미암아 그 동안 막혔던 생명나무로 가는 길이 열리고, 그 열매를 우리도 먹음으로 말미암아,
부족함이 전혀 없는 세상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는 말씀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렇게 이해하게 된다면 원죄가 있다는 근거로 제시된 로마서 5장 말씀도 원죄에 대해서는, 전통적 원죄에 대한 개념에 대해서
재검토가 필요하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 이후에도 여전히 사망이 존재한다는 것은, 죄나 저주가 유전 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에덴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이해하게 된다면, 이 점에 대해서도 모순이 없이 완전하게 납득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씀 드리자면, 당시 에덴에 있었던 아담과 하와나 지금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모든 사람이나 거의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들이나 우리나 유혹에 있어서는 연약한 존재라는 것이지요.
그렇게 생각해야 모든 말씀이 자연스럽게 이해가 돼요.
그럼 이 시점에서 여러분께 한 가지 문제를 드리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와 아직 선악과를 먹기 전인 아담과 하와를 보았을 때,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이를 알기 위해서는 선악과를 먹음으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일어난 변화를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창세기 3장 7절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구약 39권 신약 27권 총 66권 성경 중에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고 난 다음에 그들 자신에게 일어난 직접적인
변화는 바로 이 부분 뿐입니다.
그러니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으면 대단한 변화가 일어나는 줄 알았는데, 고작 자기들이 벗은 줄 알게 되었다는 것
뿐이었다는 것이에요.
이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눈이 밝아진 결과 자신들이 벗은 줄 알았다면, 그렇다면 선악과를 먹기 전에는 눈이 어두웠다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어요.
상식적으로 보았을 때 눈이 어두운 것보다는 밝은 것이 낫지 않겠어요?
하지만 어느 한 성경 주석서를 본 순간 그야말로 제 눈이 밝아졌습니다.
그 주석서에 의하면 여기서의 창세기 3장 7절에서의 ‘눈이 밝아지다’는 단어에는 히브리어 ‘파카흐’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안 보이던 것이 보이게 된다는 뜻이라고 해요.
그래서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보게 되었다거나, 또는 듣지 못하는 사람이 듣게 되었다고 할 때에도 이 단어를 사용한다고
하더라구요.
뿐만 아니라 거기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습니다.
“이것은 시력이 더 잘 보이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혹은 보아서는 안되는 것을 보게 되었다는 뜻이다.”라고
적혀 있더라구요.
아하, 이 글을 읽으니까 제 머리 속에서 모든 퍼즐이 따다다다다닥 하고 맞춰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 이것이 바로 선악을 알게 되는 거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어요.
우리가 구원을 받아 천국에 간다고 합니다만, 이는 이 땅을 버리고 하늘 저 높은 곳에 올라가서 거기서 영원히 산다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은 천국이 저 하늘 위에 있습니다. 물론 아직은 육안으로 보이지 않아요.
사도행전 3장 21절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 만물을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날에 만물을 회복하실 것이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 회복은 다름아닌 에덴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버가모 교회에 대해서 공부할 때 배우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에덴에서 내쫓으시고 그룹천사와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그 길을 막으셨잖아요.
하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말미암아 휘장이 찢어지고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 그 동안 막혔던 생명 나무로 향하는
길을 열어 주셔서 영생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는 말씀을 우리는 공부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그 날, 심판의 날, 에덴으로 들어가는 날, 계시록 후반에 등장하는 새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날은 아직 오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우리는 그 날을 사모하면서 기다리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이를 전통신학에서는 “이미 그러나 아직”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렇다면 그 새예루살렘 다시 말해서 회복된 에덴에서는 사람들이 어떤 모습으로 예수님과 다닌다고 배웠습니까.
우리가 지난 시간에 공부할 때 배웠던 것이 기억 나시나요?
예, 그렇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 4절에 보시면 어떻게 기록되어 있었습니까.
요한계시록 3장 4절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이 말씀에서 바로 흰 옷을 입고 다닌다고 하시잖아요.
이렇게 생각해 본다면 태초에 아직 선악과를 먹기 전에 아담과 하와도 에덴에서 흰 옷을 입고 다녔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여기서 좀 의문이 들었습니다.
창세기 2장 25절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성경은 아담과 하와가 흰 옷을 입고 있었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벌거벗었다고 해요.
하지만 부끄러워하지 않았다고 기록합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하고 고민을 했습니다만, 이는 앞서 말씀 드린 계시록 3장 4절의 원어를 보니까 답을 알
수 있었어요.
제가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던 내용을 기억하시면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여기서 흰 색은 어떤 색이라고 말씀 드렸어요?
예, 그렇죠. 빛이 나는 색이라고 말씀 드렸잖아요.
마가복음 9장 3절에 의하면 이는 변화산에서 예수님이 변화하셨을 때 그 옷에서 광채가 난다는 기록이 있는데 바로 그와 같은 흰
색이라고 제가 말씀 드렸습니다.
그런데 제가 다시 한번 요한계시록 3장 4절에 대한 성경주석을 찾아보았어요.
그랬더니 더 놀라운 기록이 있었습니다.
그건 뭐냐 하면 계시록 3장 4절에서 사용된 ‘흰 옷’이라고 할 때 ‘희다’라고 하는 단어가 헬라어의 ‘레우코스’라는 말이
사용되었는데, 이는 흰색이라는 뜻 만이 아니라 ‘빛나다’는 뜻도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장차 옷을 더럽히지 않은 자들이 주님과 함께 다닐 때에는 단순히 흰 옷이 아니라 “빛나는 옷”이라고 번역을 할 수도
있다는 말씀인 것이에요.
이렇게 본다면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예, 아담과 하와는 분명 벌거벗었습니다만, 그들은 마치 흰 옷을 입은 것처럼 눈부신 빛의 옷을 입고 있었다고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래서 어딜 가나 빛이 마치 옷을 입고 있는 것처럼 그들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았어요.
하지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은 순간, 그들을 둘러싸고 있던 빛은 사라지고, 그 결과 그 때까지는 상대방의 볼 수
없었던 혹은 보아서는 안되는 것, 다시 말해서 이전에는 빛나는 선한 모습만 보였는데, 빛의 옷이 사라지자 그 전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안 좋은 모습까지 보이게 되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지요.
우리나라 성경에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의 ‘선’과 ‘악’이라고 하는 단어에 대해서 주석서에 의하면,
단순히 옳고 그름이나 좋고 나쁜 것 만이 아니라 ‘선’이라고 하는 의미로 쓰인 단어인 히브리어 ‘토브’는 온갖 긍정적인 의미를
포함하고 있고, 반대로 ‘악’이라고 하는 의미로 쓰인 단어인 히브리어 ‘라’는 온갖 부정적인 의미를 포함하는 말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기 전에는 긍정적인 부분만 볼 수 있었는데, 이 열매를 먹었더니 상대방의 부정적인 부분,
보아서는 안 되는 좋지 않은 부분까지도 보이게 되었다는 뜻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이렇게 된다면 앞서 살펴본 죄의 원인이 또 하나가 추가가 됩니다.
앞에서는 결핍 때문에 죄를 짓게 된다고 말씀 드렸는데, 그 뿐만이 아니라 상대방의 안 좋은 부분, 부정적인 부분이 보이게 되면
어떤 감정을 가지게 됩니까.
그렇죠. 미움, 증오가 싹트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태초에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모든 것을 채워 주셨습니다.
하지만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에덴 밖으로 추방 당하게 되고, 에덴으로 가는 길, 생명나무로 가는 길이 막힘으로 인하여,
그 결과 결핍과 증오가 생김으로 말미암아 인류는 죄로 물들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한 완전한 순종으로 말미암아 휘장이 찢어지고, 영생으로 가는 길, 생명나무로 가는 길, 에덴으로 가는
길, 새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그리고 모든 것이 회복되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우리는 원죄라고 하는 데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죄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는 ‘결핍’과 ‘증오’에서 벗어나,
우리에게 채워주시고, 우리를 사랑해주시고, 그리고 장차 우리에게 모든 것을 회복시켜 주실 주님께 소망을 두며,
마지막 그날에 한 사람도 빠짐 없이 주님께서 주시는 빛의 옷을 입고 주님과 함께 다니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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