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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요한계시록 순수강해 19번째 시간으로서 “신앙적인 게으름과 부지런함”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버가모 교회에 보내지는 편지에 대해서 살펴보는 세 번째 시간입니다.
지난 주에 살펴본 구절에서는 발람과 니골라당이 나왔지요?
복습하는 의미에서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 2장 14절~15절
“14.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15.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성경 기록에 의하면 니골라당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구체적으로 그 내용을 알 수 없습니다만 발람에 대해서는 성경을 통해서 상당한
부분을 알 수 있었지요.
선지자 발람은 비록 처음에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했지만 나중에는 모압 왕 발락의 요구를 받아들이면서 이스라엘 자손들로 하여금 우상을
섬기게 하고, 뿐만 아니라 행음을 하게 만들어서, 영적으로나 육적으로나 음행이라는 죄를 범하게 하였으며, 이로 인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진노를 사서 결국 수많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죽임을 당하게 되었고,
뿐만 아니라 세상적인 욕심에 눈이 멀어 하나님을 버린 발람 자신도 얼마 지나지 않아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신학자들에 의하면 발람이 등장하는 민수기 22장이 기록된 연대는 대략 기원전 1410년 경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계시록은 언제 쓰여졌습니까.
아무리 빨라도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발람이 처음 등장한 시대부터 계시록이 기록된 시기까지는 무려 1400년 이상이나 벌어져 있음에도 여전히 이 발람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이,
그것도 예수님께서 머리 되신 교회 안에 버젓이 있었다고 하니 참으로 기가 찰 노릇 아닙니까.
아니, 그것 만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는 어떻습니까.
여전히 우상과 음행들이 범람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도 어디요?
예, 그렇습니다.
바로 교회 안에도 이 우상과 음행은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 건물 안에 들어가면 십자가가 있습니다.
예배 시간에는 찬송가도 불러요. 성경 봉독도 합니다.
그런데 어때요? 예, 설교가 시작되면 거기에는 무엇이 없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없어요. 복음이 없어요. 성경이 없어요. 보혈이 없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그 대신 무슨 말이 나오나요.
그것은 바로 설교자의 자기 이야기, 세상 이야기, 무슨 철학 이야기가 그 빈자리를 채우고 있는 것이지요.
저도 가끔 인터넷을 통해서 몇몇 교회 설교 말씀을 들어 보기도 합니다만, 종종 보면 이건 설교도 아니고 무슨 자기 생각,
교양강좌? 토크쇼? 그런 식으로 말씀을 하시는 경우를 간혹 봅니다.
여러분, 예배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주님을 찬양하고 주님을 경배하며, 주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성경이나 찬송은 무슨 겉치레처럼 때우고는 주구장창 자기 이야기만 늘어놓게 된다면, 그것이 어떻게 주님께 바쳐지는 온전한
예배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지요.
그것은 주님을 경배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계실 자리를 자기가 차지하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이런 내용은 성경에도 나옵니다.
베드로후서 2장 3절
“그들이 탐심으로써 지어낸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득을 삼으니 그들의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멸망은 잠들지
아니하느니라”
그렇습니다. 그들은 성경말씀을 전하지 않고 탐심으로 지어낸 말들로 사람들한테서 이득을 취해요.
대표적인 것이 무엇입니까. 돈을 많이 내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무조건 집안재산 다 팔아서, 그것도 모자라면 빚을 내서라도 자기한테 돈을 다 갖다 바치면, 자기만이 아니라 구원받지 못한
조상님들까지도 복을 받아, 무병장수 만사형통하고 천국 간다는 것이 그들의 논리인 것이지요.
그런 말은 성경 어디에도 없어요.
그런데도 자기들 배를 채우기 위해서 없는 말들을 만들어 내고 마치, 그게 하나님 말씀 성경 말씀인 것처럼 전하게 된다면, 그것
역시 우상의 가르침을 전한다고 밖에는 할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요한복음 12장 49절~50절
“49.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50.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내가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니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예수님의 말씀은 스스로의 말씀이 아니라 예수님을 이 땅으로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 말씀만을
전한다고 하시지 않습니까.
예수님도 자기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전하는 순종을 보여주셨는데, 일개 목사가 설교를 한다고 하면서 어떻게 자기
말들로만 전할 수가 있겠습니까.
요즘은 교회에 젊은 사람들이 없다고 하면서 젊은 세대의 믿음이 없음을 한탄하는 말을 듣기도 합니다만, 저는 그와 같은 의견에
동의하기가 어렵습니다.
옛날에는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중에서 보면 성경을 읽는 분들이 그리 많지 않았어요.
그 이유는 몇 가지가 있겠지요.
하나는 성경책이 너무 비쌌습니다.
60~70년 대 때만 해도 그 때는 우리나라가 많이 어려웠잖아요.
그래서 당시 성경책 가격을 보면, 그 때는 쌀도 귀한 시대인데 그 쌀 한 말보다도 비쌌다는 거예요.
그러니 성경책을 사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았겠지요.
또 하나의 이유는 그 내용이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개역개정은 그래도 많이 표준어에 가까워졌습니다만, 개역한글 성경만 하더라도 문어적인 표현이 많이
있었지요.
한 예로 ‘가라사대’라는 말은 정말 성경에만 나오는 표현이잖아요.
뿐만 아니라 예를 들어서 이 구절은 어떻습니까.
시편 83편 2절 (개역한글)
“대저 주의 원수가 훤화하며 주를 한하는 자가 머리를 들었나이다”
이는 개역한글 성경인데 지금 우리가 보더라도 ‘훤화’가 무슨 뜻이며 ‘한하는 자’는 무슨 뜻인지 웬만해서는 알기가 어렵겠지요.
참고로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개역개정 성경에는 다음과 같이 나와 있어요.
시편 83편 2절 (개역개정)
“무릇 주의 원수들이 떠들며 주를 미워하는 자들이 머리를 들었나이다”
이렇게 하니까 조금은 이해하기가 수월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말투도 말투이거니와 당시 우리나라 국민들의 교육수준은 그리 높지 않았습니다.
중학교는 고사하고 초등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한 사람들이 많은 상황에서 성경책처럼 두껍고 글씨가 작은 책을, 그것도 저렇게 난해한
말투로 되어 있는 책을 읽고 올바로 이해한다는 것은 적지 않게 어려웠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성경책을 읽는다기보다는, 그저 목사님의 말씀이 성경 말씀이려니 하고 설교말씀만 듣고, 그리고 기도하고
금식하고 그랬던 것이 과거 우리나라에 있어서의 신앙생활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떻습니까.
우선 가격면으로 본다면 3~4만원 정도면 웬만한 성경책을 살 수가 있어요.
옛날에 비하면 가격은 많이 저렴해 졌고, 반면에 종이나 제본기술 등 품질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아졌지요.
그 정도의 가격도 비싸다고 한다면 중고책 성경도 있잖아요.
꼭 새 책만 읽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중고 성경책은 물론 그 상태에 따라서 가격은 다르겠지만 새 책에 비해 많이 저렴하겠지요.
그런데 그 돈도 없다고 한다면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렇다면 동네에 있는 교회에 한 번 찾아가보세요.
작은 교회는 좀 그렇겠습니다만,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교회에 가서 거기 계신 분께 말씀 드리기를, 제가 성경을 좀 읽고 싶은데
한 권 얻을 수 없겠냐고 말씀을 해보세요.
그런 교회에는 예배당에 비치해 놓은 성경책들이 많이 있을 것 아니에요?
그렇다면 성경을 읽고 싶은데 돈이 없어서 성경책을 살 수 없다고 한다면, 그 중에서 한 권 정도 안 주시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국민들 교육수준도 상당히 높아졌습니다.
옛날에는 고등학교 나온 사람들도 그리 많지가 않고, 대학교는 그 수가 적어서 그야말로 선택 받은 사람들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어떻습니까.
대학 수는 훨씬 늘어서, 마음만 먹는다면 누구나 대학에 진학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이제 성경책 정도는 다 읽을 수가 있어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옛날처럼 세상 이야기나 자기 이야기를 마치 성경말씀처럼 하고 있게 된다면, 지적수준이 훨씬 높아진
요즘 사람들이 누가 가겠냐 하는 것이지요.
옛날에는 목사님들이 자기 멋대로 해도 성도님들이 몰랐어요.
그저 목사님 말씀이 성경말씀이라고 믿고 있었던 시대였으니 어쩔 수가 없었겠지요.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젊은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자기 이야기를 하나님 말씀처럼 말해봤자 이제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특히 요즘은 어떻습니까.
그것은 바로 악성 전염병처럼 번지고 있는 정치 이야기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목사라는 직함을 달고서 정치를 좋아하시는 그분들이 얼마나 정치 공부를 많이 하셨는지는 모르지만, 예수님 말씀과 성경 말씀이
선포되어야 할 거룩한 예배 시간에, 이번 선거에서 누구를 찍어야 한다며 정치선동을 하거나, 또는 누구를 비방하는 주장들을 하게
된다면, 그건 교회에서 예수님이 머리가 되는 것이 아닌, 자기가 예수님의 자리를 차지하겠다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이단 사이비 집단이나 특정 종교집단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대형보수교단에 속해 있으면서도 성경이 아닌 자기 생각이나 정치적 또는 세상적인 말만 심어주게 된다면 그게 이단이지 무엇이
이단이겠습니까.
사무엘상 4장에서는 이스라엘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패하게 되자 사울은 후방에 있던 언약궤를 가져오라고 합니다.
언약궤가 진영에 들어오자 군사들의 사기가 올라갔겠지요.
사무엘상 4장 5절에 의하면 군사들이 큰 소리로 외치자 땅이 울렸다고 합니다.
자, 이제 하나님의 언약궤가 이스라엘 진영에 들어왔어요. 군사들의 사기도 올랐습니다.
그렇다면 전쟁에서 이기겠습니까, 지겠습니까.
당연히 이기지 않겠어요? 언약궤는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는 성물이잖아요.
그렇다면 아무리 불리한 전쟁도 승리하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결과는 어땠습니까.
사무엘상 4장 10절~11절
“10.블레셋 사람들이 쳤더니 이스라엘이 패하여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였고 살륙이 심히 커서 이스라엘 보병의 엎드러진 자가 삼만
명이었으며
11.하나님의 궤는 빼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하였더라”
이게 웬일입니까. 이기기는커녕 전쟁에서 크게 패하고 언약궤까지 빼앗겨버렸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 언약궤는 가짜였나요?
아닙니다. 그 안에는 분명 십계명이 새겨진 돌판이 들어있는 진정한 언약궤였어요.
블레셋 사람들이 빼앗은 언약궤를 자신들의 우상과 같이 두었더니 그 우상이 쓰러지고 망가집니다.
뿐만 아니라 그곳 사람들에게 질병이 퍼져서 많은 사람들이 희생 되었다고 해요.
이를 못 견딘 블레셋 사람들은 언약궤를 다시 이스라엘에게 돌려주게 됩니다.
이렇게 이스라엘로 돌아온 언약궤는 오랫동안 기럇여아림이라는 곳에 있다가, 나중에 다윗이 왕위에 오르고 예루살렘을 정복할 때까지
머무르게 되지요.
그러다가 사무엘하 6장에 의하면 드디어 다윗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려는 모습을 볼 수가 있어요.
그렇지만 이를 옮기는 과정에서 이 임무를 맡은 자 중 하나인 웃사가 사망을 하는 일이 발생을 합니다.
이로 인해서 언약궤 운반직업은 일시적으로 중단하게 되는데, 이 일 때문에 언약궤가 오벧에돔이라고 하는 사람 집에 석 달 정도
머무르게 됩니다.
이렇게 보면 언약궤가 있는 곳에 무슨 재앙만 내리는 것처럼 보이는데,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무엘하 6장 11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사무엘하 6장 11절
“여호와의 궤가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을 있었는데 여호와께서 오벧에돔과 그의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
이처럼 언약궤는 축복도 주시잖아요.
자, 여기까지 읽어온 우리들은 이제 혼란스럽습니다.
똑같은 언약궤임에도, 왜 어떤 때는 재앙을 내리고 또 어떤 때는 복을 주시는 것일까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기에 한약이라고 하면 어떻습니까.
요즘은 한약 먹기가 참 간편해졌더라구요?
옛날에는 한약을 지어 먹는다고 하면, 참 여러가지로 번거로웠지요.
제가 어렸을 때에도 몇 번 가본 기억이 있습니다만, 희미한 제 기억에 의하면, 한약방에 가면 나이 지극하신 선생님이 약재를 골라서
작두 같은 것으로 자르고는 각각 종이 포장지에 싸 줍니다.
그러면 그걸 가지고 와서 약탕기……라고 하나요? 거기에 약재와 물을 넣고 끓입니다.
그리고는 그걸 그릇에 대고 이렇게 짜요.
그럼 아주 진한 밤색 물이 나오잖아요?
그러면 그걸 식기 전에 마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제 머리에 한약이라고 하면 거의 검은 약물, 그야말로 사극에 나오는 사약 같은 것을 후후 불면서 마시는 것이라는 이미지가
아직도 있어요.
그런데 말이에요. 모든 한약이 그렇게 먹는 게 아니라고 하더라구요.
약재 중에 어떤 것은 반드시 차갑게 해서 먹어야 한다는 것이에요.
어느 분 말씀에 의하면 그 약재는 정말 얼음이 동동 떠 있는 상태에서 먹어야 하지, 만약에 뜨거운 상태에서 마시게 되면 독성이
올라와서 큰일난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언약궤도 보세요. 하나님의 언약궤를 우상이 있는 자리에 놓는다고 하면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모욕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그 자리에 있던 우상이 쓰러지고 사람들에게는 재앙이 내려진 것이지요.
그리고 다윗이 언약궤를 옮기려고 하는데 그 임무를 맡은 웃사가 사망하는 일이 발생하는데 우리는 여기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무엘하 6장 7절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가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그를 그 곳에서 치시니 그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여기를 보십시오.
이는 단순 사고가 아니라 웃사가 잘못했기 때문에 진노하셔서 하나님께서 치셨다고 분명히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무엇을 잘못한 것일까요.
핵심은 바로 앞 3절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무엘하 6장 3절
“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그 새 수레를 모니라”
여기서 무엇이 문제였는지 혹시 아실 수가 있으신가요?
자, 언약궤의 운반에 대해서 율법에는 다음과 같이 규정합니다.
민수기 4장 15절
“진영을 떠날 때에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성소와 성소의 모든 기구 덮는 일을 마치거든 고핫 자손들이 와서 멜 것이니라 그러나
성물은 만지지 말라 그들이 죽으리라 회막 물건 중에서 이것들은 고핫 자손이 멜 것이며”
민수기 7장 9절
“고핫 자손에게는 주지 아니하였으니 그들의 성소의 직임은 그 어깨로 메는 일을 하는 까닭이었더라”
율법에 의하면 하나님의 성물은 이스라엘 자손들 중에서도 레위지파 사람들 만이 만질 수 있었으며, 특별히 언약궤를 옮길 때에는 그
중에서도 고핫 자손들이, 어떻게 옮겨요?
예, 어깨에 메고 옮겨야 한다고 되어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웃사는 어떻게 했습니까.
예, 언약궤를 수레에 실었다고 합니다.
사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사람들이 어깨에 메는 것보다 수레로 운반하는 것이 더 빠르고 편할 수도 있겠지요.
그리고 사실 웃사도 악의는 없었을 거예요.
어쩌면 언약궤를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에서 사람이 메는 것보다는 수레로 옮기는 것이 더 안정적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지요.
수레 그것도 새 수레로 옮겼다고 하잖아요. 여기서도 그의 마음이 엿보인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의 의도가 선했다고 하더라도 이는 분명 율법을 어긴 행위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니, 그런 율법을 웃사가 모를 수도 있지 않았겠느냐. 어떤 분은 그러실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생각해보십시오. 당시 하나님의 언약궤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는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알고 있었던 사실입니다.
또한 이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오는 일은 다윗이 친히 명한 임무였습니다.
말하자면 어명이었던 것이지요.
그런 상황에서 다윗이 아무한테나 맡겼겠어요?
적어도 그와 같은 임무를 감당할 만한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맡겼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웃사는 자신의 소임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어요.
그렇다면 이와 같은 경우는 당시만이 아니라 지금 이 시대에 있어서의 법률로도 처벌할 수 있을까요?
예, 지금도 이런 일을 저지르면 처벌을 받습니다.
우리나라 형법에는 다음과 같은 조항이 있어요.
형법 제14조
【과실】정상적으로 기울여야 할 주의(注意)를 게을리하여 죄의 성립요소인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행위는 법률에 특별한 규정이 있는
경우에만 처벌한다.
이처럼 정상적으로 기울여야 할 주의를 게을리해서 죄가 성립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고 한다면 처벌을 받는다고 합니다.
이를 본다면 어떻습니까.
웃사는 하나님의 언약궤를 옮긴다고 하는 막중한 임무를 맡게 되었다고 한다면 그 운반방법을 알아내는 것은 정상적으로 기울여야 할
주의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이를 게을리 했어요.
그 결과 분명 율법에 적혀 있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웃사에게는 악의가 없었다고는 해도, 자신이 감당해야 할 임무를 게을리 했다고 하는 과실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았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지금 이 시대에 있어서 신앙적인 과실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성경에서 벗어나는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책에 의하면 지금 우리나라에 있어서의 기독교에는 적지 않은 무속적 신앙의식이 팽배하다고 합니다.
이는 무엇을 뜻합니까. 기독교에 뿌리내린 무속적인 신앙의식이라고 하는 것이 쉽게 말해서 왜 자리잡게 되는 것입니까.
예, 간단합니다. 그것은 바로 성경에서 벗어난 믿음, 복음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결과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아무리 악의가 없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여호수아 23장 6절
“그러므로 너희는 크게 힘써 모세의 율법 책에 기록된 것을 다 지켜 행하라 그것을 떠나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잠언 4장 27절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네 발을 악에서 떠나게 하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말씀에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요즘 한국의 기독교는 좌로 치우치고 우로 부딪치고, 그야말로 좌충우돌인 상태 아니겠습니까.
이와 같은 상황에 대해서 주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요한계시록 2장 16절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여러분 혹시 기억하시나요? 예수님께서 버가머 교회에 대해서 말씀을 하시면서 스스로를 어떻게 소개하셨습니까.
요한계시록 2장 12절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그렇습니다.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라고 하시지요.
그리고 16절에서는 입의 검으로 그들, 다시 말해서 회개하지 않는 그들과 싸우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다른 말로 하자면 준엄한 심판을 내리시겠다는 말씀이라고 하겠지요.
주님의 입의 검으로 내리시는 심판을 어느 누가 피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이와 같은 심판을 받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앞서 현행법상으로 웃사의 죄책이 무엇이라고 말씀드렸습니까.
“정상적으로 기울여야 할 주의(注意)를 게을리하여 죄의 성립요소인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행위”
라고 했잖아요.
아무리 악의가 없었다고는 하나, 당시 왕으로부터 언약궤의 운반이라고 하는 중책을 맡았다면 당연히 기울여야 할 주의를 게을리 했기
때문에 지금의 법률로 본다 하더라도 처벌을 피할 수 없다고 말씀드린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우리 안에 예수님을 모독하거나 불순종하겠다고 하는 나쁜 마음이 없었다고 해도 우리가 신앙적으로 당연히 기울여야 할 주의를
게을리 한다면 이는 하나님의 진노함을 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를 피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호세아 6장 3절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그렇죠. 힘써 여호와를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알 수 있을까요.
이는 두말하면 잔소리죠. 바로 성경을 알아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호수아 1장 8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시편 1편 2절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여러분, 여러분께서는 병원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예, 그것은 바로 의학지식이 부족한 의사입니다. 법원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은 법률지식이 부족한 법조인이겠지요.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은 성경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목소리만 큰 목사나 교역자 아니겠습니까.
이 얼마나 무섭습니까. 생각만 해도 끔찍하지 않습니까.
이런 사람들이 성경에도 없는 주장을 내세워가면서 자기 머리에서 나온 궤변을 역설하게 되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가
돌아가겠습니까.
성경적으로 죄악을 나타내는 말은 히브리어로 하타라고 하고 헬라어로는 하마르티아라고도 하는데, 이는 본래 뜻이 똑같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과녁에서 빗나간다, 표적을 맞추지 못한다는 뜻이라고 해요.
그러면 이제 이해가 되지 않습니까.
죄악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좌로나 우로나 빗나가는 것, 그것이 죄악이 되는 것입니다.
이는 무엇에서 비롯됩니까.
그것은 바로 성경의 무지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벗어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게 되면 이는 순식간에 타락해서 결국 우상숭배와 음행으로 빠져들어갈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쉬운 예로 본다면 예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성경은 읽지 않고 예수님 동상을 세워 놓고 밤낮으로 그 동상을 닦고만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그 마음 안에 악한 의도는 없다고는 하나 그것이 온전한 믿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그것이 결과적으로 우상숭배라고 하는 죄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런 일들이 지금도 얼마나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이단 사이비 집단이나, 성경에서 벗어난 주장을 하는 교회에서 전하는 헛된 가르침에 빠져서 시간과 돈과 인생을 송두리째 빼앗기고는,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 속에서 허덕이고 있는 현실이 바로 그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깨어나야 합니다. 신앙적 게으름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부지런히 여호와를 알고 부지런히 예수님을 알고 부지런히 복음을 알고 부지런히 성경을 알아 감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해 주신 크고 놀라운 축복을 모두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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