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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요한계시록 순수강해 16번째
시간으로서 “생명의 면류관과 불의 연못”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지난 주는 서머나 교회에 보내는
편지 중에서 전반부를 살펴보았습니다만, 오늘은 후반부를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10절 말씀부터 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 2장 10절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자, 이는 약속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주님께서는 서머나 교회 사람들이 고난을 받게 될 것을 말씀하세요.
그런데 그 시험이 어떤 시험이라고 하세요?
예,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도 고난이 있나요? 예, 때로는 고난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가끔 보면 고난이 찾아올 경우, 아니 도대체 내가 무슨 잘못을 했는데 이런 일을 당해야 하냐고 그러면서 그저
무턱대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예수님을 저주합니다.
하지만 서머나 교회를 보세요.
지난 주에도 살펴본 바와
같이 서머나 교회는 책망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고난을 받게 된다고 하세요.
그것도 그 고난은 마귀에
의한 고난이라고 하십니다. 이 얼마나 끔찍한 일이겠습니까.
이어서 주님은 그 시험에 대한 내용에 대해서 말씀하시는데,
마귀가 몇 사람을 옥에 던져 10일 동안 환난을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신학자들은 이 부분에 대해서 다양하게 해석을
합니다.
특별히 여기에 나와 있는 ‘10일’이라고 하는 기간에 대한 해석인데,
어떤 사람들은 문자
그대로 10일이라고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정확히 10일이 아니라 10일 정도 되는 짧은 기간을 가리킨다고도 하고, 또는
10일이라고 하는 말씀은 10일이 아니라 10년을 가리킨다고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성경해석에 있어서 제가 항상
드리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성경말씀은 원칙적으로 문자 그대로 받아 드려야 한다는
점입니다.
물론 성경에도 하루를 1년으로 계산한 경우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광야에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불순종해서 광야로 다시 돌아갈 것을 명하실 때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께 순종만 했었다면 이스라엘을 탈출하고 시내산을 지나 얼마 못 되어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제 가나안 땅을 목전에 두고 모세가 가나안 땅으로 12명의 정탐꾼을 보내는데, 40일 동안 정탐을
하고 돌아온 정탐꾼들 중에서 하나님께 순종했던 갈렙과 여호수아를 제외한 10명의 정탐꾼들이 그 땅을 점령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러자 이 말을 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원망하면서 대성통곡을 해요.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민수기 14장 30절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에게 살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나님께서 약속한 축복의 땅에는 당시 결정권이 있었던
성년이었던 사람들 중에서 갈렙과 여호수아를 제외하고는 모두 광야에서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하시는 장면을 보실까요?
민수기 14장 33절~34절 “33.너희의 자녀들은 너희 반역한 죄를 지고
너희의 시체가 광야에서 소멸되기까지 사십 년을 광야에서 방황하는 자가 되리라 34.너희는 그 땅을 정탐한 날 수인 사십
일의 하루를 일 년으로 쳐서 그 사십 년간 너희의 죄악을 담당할지니 너희는 그제서야 내가 싫어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알리라 하셨다
하라”
자, 이제 하나님께 불순종한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 죄의 대가로 광야를 떠돌게 될 것인데, 그 기간은 정탐했던
하루를 1년으로 쳐서 40일 동안 정탐했으니까 40년 동안 광야를 떠돌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하루를
1년으로 환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만, 그럴 때는 하나님께서 직접 이렇게 말씀을 해 주십니다.
그렇지 않고 하나님께서
하루라고 하셨는데 알고 보니 1년이었다? 만약에 그게 사실이라면 얼마나 황당하겠습니까.
생각해보세요.
어떤 사람이 무슨 잘못을 해서 재판을 받게 되었는데 판결이 구류 10일이었어요. 그러면 10일이 지나면 풀어줘야 하잖아요.
이제 10일이 지났는데 하루가 지나도 이틀이 지나도 안 풀어줘요.
그래서 아니, 판결이 10일인데 왜 안
풀어 주냐고 물었더니, 판결은 10일이지만 10년 뒤에 풀어주겠다고 했다고 생각해보세요.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10일이라고 했는데 알고 보니 10년이었다?
아니, 무슨 사람 답답해 미쳐 죽는 꼴 보시려고 그러시겠습니까.
성경을 보세요.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 말씀은 일점일획 정확하게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서머나 교회 성도들에게 10일 동안의 시험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시험은 마귀에 의한 시험이에요.
자,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잘못도 없는 서머나 교회 성도들에게 마귀에 의한 시험을 말씀하신 것일까요.
그 이유
역시 오늘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장 10절 후반부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주님께서 서머나 교회 성도들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단순히 그들을 괴롭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놀라운 축복, 생명의 관을 주시기 위해서라고 주님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의 잘못을 뉘우치게
하시고 회개하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시련을 주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도
주님께서 고난이나 환난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그것은 주님이 우리를 미워해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더할 나위 없는 크나큰 축복을 주시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실 이 세상에 시험을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또 보면 세상에는 비싼 돈까지 내면서 시험을 보는 경우도 있잖아요?
대표적인 것이 뭐 외국어는 영어면 토익이나
토플, 일본어는 JLPT나 JPT, 그 외에도 입학시험, 입사시험, 자격시험 등 정말 알고 보면 세상에는 온갖 시험으로
넘쳐납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시험은 싫어하면서도 한편으로 그런 시험을 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
그것은 바로 그 시험을 침으로 인해서 얻는 것이 있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시험이라고 하는 것은 준비하는 것도
힘들고, 그리고 시험을 치는 과정도 얼마나 긴장되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일입니까.
저 같은 경우를 보면 아직도
시험을 보는 꿈을 꿔요.
가끔 보면 제가 꿈속에서 아직도 대학 강의실에서 시험을 보고 있어요.
그러면서 그런 생각을 해요. 이상하다. 분명 내가 졸업을 한 것 같은데 왜 내가 여기서 지금 시험을 보고 있을까.
그런 정말 꿈을 아직도 꿀 정도로 저도 시험이라면 정말 스트레스를 많이 받습니다.
하지만 세상적으로 보아도 시험을
봐서 결과를 내야지만 얻을 수 있는 것들이 많지 않습니까.
시험을 준비하는 것도 힘들고 시험을 치는 것 자체도
힘들지만, 거기서 좋은 결과를 내기만 하면 훨씬 더 좋은 것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시험을 치는 것이지요.
이는 믿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로마서 8장 18절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바울의 글은 정말 놀랍습니다. 이 짧은 한 마디로 시험에 대해서 완벽하게 정리를 하지 않았습니까.
이 한 문장은 곧 주님께서 주시는 고난이나 시험을 두려워하거나 피하는 것이 아니라 기쁨으로 감당해야 하는 이유를
명확하게 말해주고 있는 것이지요.
이를 모르는 사람들은 시험을 피하려고 합니다. 거부하려고 해요.
하지만 주님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은 기쁨으로 그 시험을 받아들이고 감사함으로 감당하려고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18절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많이 비웃을 것입니다. 아니, 예수 안 믿고 세상적으로 살면 더 잘 살 수 있을
건데, 왜 예수 믿고 고생을 사서 할까.
하지만 믿음이 있다면 알 수 있지요.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세상 사람들이 미련하다고 아무리 비웃는다 하더라도, 우리가 감당하고 있는 시련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겨낼 수
있는 것이요, 그 너머에는 우리가 상상하지도 못할 정도로 놀라운 축복이 우리를 위해서 예비되어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요한계시록 2장 11절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자, 여기서 ‘둘째 사망’이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계시록 강해 좀 뒤에 가서 자세하게 다루어 보기로 하겠습니다만, 간단히 생각해본다면, 대부분의
사람, 그야말로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까지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나 한 번은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것이
첫째 사망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사망을 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원한 맺힌 영혼은 구천을 떠돌며 어두컴컴한
곳에 나타나거나 그러나요? 성경에는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히브리서 9장 27절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예수 믿는 사람들은 돌아가신 사람들 앞에 절을 하거나 제사를 드리지
않습니다.
그것은 조상님들이나 먼저 가신 가족들에 대해서 존중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에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돌아가신 날에 사진이나 위패를 놓고 식사를 차려 놓고 거기에 절을 하고 그러면 돌아가신 영혼이
와서 그 대접을 받고 조상님들의 영혼이 자기들을 지켜준다고 믿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잖아요.
하지만 이 세상에서
돌아가신 사람의 영혼은 더 이상 이 땅에 없습니다. 그렇게 한가하지 않아요. 곧바로 심판대 앞에 서게 되는 것이지요.
성경에도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자기 아내 사라를 얼마나 사랑했습니까. 그리고 사라가 사망한 뒤에도 얼마나 가슴 아파
했습니까. 그야 당연하지요.
그러나 사라가 사망한 날에 맞추어 매년 묘지에 가서 제물을 바치고 섬겼다는 말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는 아브라함 자신에 대해서도 그렇고 이삭이나 야곱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40년 동안 이끌었던 모세에 대해서는 신명기 34장 6절에 의하면 그의 묘지가 어디 있는지 아예 아는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가톨릭을 보면 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를 드리는 관행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기독교에서는, 아니,
적어도 성경에는 그와 같은 기록은 없습니다.
물론 애도를 하지요. 그리고 남아 있는 가족 친지들을 위로해야 하겠지요.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습니까.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지금 살아 있는 사람들을 위한 일이에요. 세상을 떠난 사람들에
대해서는 이미 우리의 소관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알아서 하실 일이에요.
아무리 우리와 가까운 사이였던 사람이라
하더라도, 주님, 그 사람이 나쁜 짓은 많이 했습니다만 그래도 천국에 가게 해 주시옵소서 하고 아무리 우리가 기도를 해봐야 본인이
회개하지 않았으면 전혀 소용없는 일이고,
반대로 글쎄요, 그런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내가 아무리 미워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주님께서 그 사람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신다면 천국으로 가겠지요.
제가 일본에서 사역할 때나 그리고
지금도 한국에서 사역을 감당하고 있을 때,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전도지를 들고 나갑니다. 그리고 집집마다 다니면서 전도지를
돌려요.
하지만 제가 공동묘지를 가겠습니까.
일본에 보면 일반 주택가에도 크고 작은 묘지들이
있습니다만, 거기를 돌면서 전도지를 돌려요?
만약에 죽은 사람들의 영혼이 거기에 있다면, 그리고 아직 심판을 받기
전이라면 더 늦기 전에 예수님을 영접하고 구원 받으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그렇지만 어떻습니까.
예,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들의 영혼은 그 묘지에 없고, 그리고 심판도 순식간에 끝납니다.
이 세상에서의 재판은 아무리
유능한 판사라고 해도, 결국은 사람이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판결이 100프로 정확하다고 장담할 수가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2심, 3심까지 재판을 받을 수 있게 해 놓은 것이잖아요.
그러다 보니 판결확정까지 몇 년이 걸리는 경우도
드물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재판은 확실합니다. 그 판결에 실수가 없어요. 그 이유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모르는
것이 하나도 없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나중에 공부하게 되겠지만 예습하는 의미에서 계시록 20장
말씀을 볼까요.
요한계시록 20장 12절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여기에 보면 ‘죽은 자들’이라고 나옵니다. 이는 첫째 사망을 가리키는 말이지요.
우리가 이 세상에서의 생을
마감을 하면 누구나 심판대 앞에 서게 됩니다.
여기서 핵심은 바로 생명책에 이름이 있느냐 하는 것이지요. 이
생명책은 정식이름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계시록 13장 8절과 21장 27절에 나오는 ‘어린 양의 생명책’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아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사망한 다음에 장차 첫째 부활을 하게
됩니다. 그것이 곧 완전한 부활입니다.
이처럼 어린 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있어 구원 받는 천국백성에게 둘째 사망은
없습니다.
하지만 구원 받지 못한 사람에 대해서는 첫째 사망 이후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고 그 결과 어떻게 된다고
하십니까.
요한계시록 20장 14절~15절 “14.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15.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예, 어린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없으면 불못 즉
불로 된 연못에 던져지게 된다고 하세요. 이것이 바로 둘째 사망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요한계시록 2장 11절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이 세상에는 믿음이 있는 사람도 없는 사람도 죽음에 대해서 말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죽은
뒤에 있을 일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들도 많아요.
믿음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는 천국에 갔다 왔다, 지옥에 갔다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본인이 정말이라고 강력하게 주장을 한다 하더라도 그 누구도 그것이 정말 사망
이후의 일인지 아니면 단순히 꿈을 꾼 것인지는 장담할 수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렇죠. 그
사람이 정말로 죽은 다음에 부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있어서 확실하게 말씀하실 수 있는 분이
계세요. 그 분이 누구십니까.
그렇죠.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사망 뒤에 일어날 일에 대해서 말씀을
하시기 위해 예수님은 이미 서머나 교회로 보내는 편지 서두에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요한계시록 2장 8절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이르시되”
예수님은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잠시 의식을 잃었다가 기절했다가 깨어난 것이 아니에요.
완전히 사망을 했다가
사흘 뒤에 부활하시고 지금 이 순간도 그리고 영원토록 살아 계신 예수님이시기 때문에, 죽음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완전하게 말씀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면류관은 받아도 되고 안 받아도 된다는 문제가 아니에요. 반드시 받아야 하는 면류관이요, 반드시 받아야
하는 상입니다.
그렇다면 이를 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세요?
예, 그렇습니다. 죽도록
충성하라고 말씀하세요. 충성을 해도 되고 안 해도 된다는 문제가 아닙니다. 반드시 충성을 해야 한다고 주님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앞에 두 갈래의 길이 놓여져 있습니다. 그것은 생명의 면류관을 받는 길과 불로 들끓는
연못으로 던져지는 길입니다.
그리고 그 기준은 어린 양 예수님의 생명책에 이름이 있는지에 달렸는데, 거기에는 오로지
주님께 충성한 사람들만 오를 수 있는 것이지요.
이를 알게 된 우리에게는 더 이상 다른 선택지는 없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어떠한 환난이 다가온다 하더라도 주님께서 주실 생명의 면류관에 소망을 두고 죽도록 충성하여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됨으로 말미암아, 마지막 날에 부활의 기쁨으로 천국 백성이 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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