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10회 [요한계시록 제14회] 겉옷과 예수님 - 이루리라교회
 

홍성필 목사
이루리라교회
www.이루리라.com
mail@IRURIRA.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장 1절~7절
“1.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가 이르시되
2.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3.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4.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5.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6.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7.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    


설교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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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요한계시록 순수강해 14번째 시간으로서 “겉옷과 예수님”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부터 이제 일곱 편지에 대한 내용을 함께 살펴보게 됩니다.

요한계시록 1장 11절 말씀부터 복습하는 의미에서 볼까요?

요한계시록 1장 11절
“이르되 네가 보는 것을 두루마리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등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이 편지는 밧모섬의 요한, 지난 주부터는 요한계시록의 저자 요한을 ‘밧모섬의 요한’이라고 부르기로 했지요?

이 편지들은 주님으로부터 명을 받아서 기록한 내용인데 이는 지난 주에 살펴본 바와 같이 단순히 이 편지가 기록된 시대,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2천년 전에 있었던 몇몇 교회에 관한 내용이라고 보는 것이 아니라, 시대적으로는 당시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지금 이후에도 있을 모든 교회, 그리고 지리적으로도 이 편지가 보내졌던 소아시아, 지금의 튀르키예 지방에 있던 교회만이 아니라 전세계에 있는 모든 교회를 향해, 나아가 그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보내진 편지로 보아야 하는 것이고, 그리고 구체적으로는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각 개인에게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편지로 받아들이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편지들을 보면 그 흐름에 있어서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대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여섯 가지 순서로 기록되어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 내용은 첫째로 수신하는 교회, 둘째로 발신자의 권위, 셋째로 칭찬의 근거, 넷째로 책망의 근거, 다섯째로 권면의 말씀, 그리고 마지막 여섯째로 약속의 말씀입니다.

어떤 교회에는 일부가 없거나 또는 순서가 다소 변동되는 경우가 있습니다만, 대체적으로 이상과 같은 순서로 기록되어 있다고 하겠습니다.

자, 이제 그렇다면 오늘은 우선 에베소 교회부터 보도록 하겠습니다.

에베소 교회에 대해서는 오늘 본문에서 알 수 있듯이 요한계시록 2장 1절부터 7절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장 1절 전반부
“1.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우선 시작은 수신자 에베소 교회가 언급되어 있지요. 여기에 ‘사자’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1장 20절에도 등장했지요.

이 부분에 대해서 원어에 보면 헬라어로 ‘앙겔로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단어는 엔젤 즉 천사를 나타내는 말이라고 하겠습니다만, 각 교회의 천사라고 하는 표현에는 성경 전체의 흐름으로 보았을 때 다소 부자연스러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개역개정에서도 ‘천사’가 아닌 ‘사자’로 번역해 놓은 것 같습니다.

그럼 다른 번역본들을 한 번 비교해볼까요?

공동번역에서는 이 부분을 ‘천사’라고 번역한 반면, 새번역에서는 ‘심부름꾼’, 그리고 현대인의성경에서는 ‘지도자’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천사라고 하면 가브리엘이나 미가엘 같은 천사를 생각하기 쉬운데, 심부름꾼이나 지도자라고 한다면 이는 사람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에 따라서 신학자들 사이에서는 여기에 적힌 ‘사자’라는 부분을 ‘천사’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는가 하면 각 교회를 책임지고 있는 지도자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제 견해를 말씀 드린다면, 만약에 이를 천사로 해석하게 된다면, 주님께서는 사람의 손을 빌려서 천사에게 편지를 썼다는 뜻이 되는데, 이와 같은 경우는 성경 어디에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천사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명을 받아서 임무를 수행하게 되는데, 굳이 사람을 통해서 말씀을 전달을 하게 된다면 적지 않게 부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겠지요.

따라서 앞선 계시록 1장 20절도 그렇고 각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 등장하는 ‘사자’에 대해서는 우리가 아는 ‘천사’라기보다는 각 교회를 책임지고 있는 교회 지도자, 리더라고 이해하는 것이 더 본래의 뜻에 맞지 않을까 합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에베소 교회 지도자에게 편지를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세상 편지도 그렇듯이 발신자가 누구인지를 밝히셔야 하겠지요.

여기에 대해서 주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요한계시록 2장 1절 후반부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가 이르시되”

예수님께서는 자신에 대해서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앞서 1장 20절에는 이 말씀에 대해서 이렇게 나옵니다.

요한계시록 1장 20절
“네가 본 것은 내 오른손의 일곱 별의 비밀과 또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금 촛대는 교회를 상징하고 별은 그 교회의 사자 그러니까 지도자를 나타낸다고 하면, 2장 1절 후반부에서는 교회 사이를 지나시고 교회 지도자를 붙잡는다는 뜻이 되겠지요.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에베소서와 골로새서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에베소서 1장 22절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골로새서 1장 18절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여기서 각 구절에 등장하는 ‘그’는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여기서의 예수님은 교회에 있어서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관자로서 에베소 교회에 편지를 보내고 계시다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자, 그와 같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이제 들어봐야겠지요?

요한계시록 2장 2절~3절
“2.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3.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여기에 보시면 교회의 머리 되신 예수님께서는 에베소 교회 사람들이 한 행위와 수고 그리고 인내를 알고 계시다고 해요.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는 우리가 알 수 없겠습니다만, 악한 자를 용납하지 않고, 자칭 사도라고 하는 사람이 거짓이라고 하는 것을 드러나게 했을 뿐만 아니라 믿음을 지키기 위해 참고 견디면서 부지런히 예수님을 섬겼다고 합니다.

이 요한계시록이 정확하게 몇 년에 기록되었는지에 대해서도 본문에는 나와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기록에서 ‘자칭 사도’라고 하는 말이 나오는 것을 보면, 아직 사도들이 살아 있거나 또는 살아 있다고 해도 믿을 만한 연대였을 것이라는 추측은 가능하겠지요.

당시에는 아직 성경이 완성되지 않은 상황이기에 사도가 정확하게 누구인지 알지 못했을 수도 있겠고, 그리고 알고 있다고 해도 지금처럼 사진이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베드로나 바울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는 사람들도 많지 않았겠어요?

그와 같은 상황에서 “내가 사도 누구누구다”라고 한다면 일단 믿을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르지요.

글쎄요. 무슨 목적으로 그와 같이 사도를 사칭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예수님께서도 친히 이와 같이 말씀하실 정도이니 이는 대단히 심각한 상황, 예컨대 복음이 변질될 수도 있는 상황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이렇게 되면 성도들 사이에 있어서도 적지 않게 동요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아직 교리가 제대로 확립되지 않은 상태라면 무엇이 올바른 믿음인지 무엇이 올바른 복음인지에 대해서 적지 않게 혼란이 있을 수 있었겠지요.

그런 일들이 적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은 다음 구절에서도 알 수 있어요.

요한계시록 2장 6절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여기에 등장하는 ‘니골라 당’이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성경에는 명확하게 기록되지는 않습니다.

다만 신학자들은 어느 한 구절에 주목을 해요.

사도행전 6장 5절~6절
“5.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6.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이제 교회가 성장하고 성도들이 늘어가게 되니까 이를 관리하는 업무가 많아집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기도와 말씀 사역에만 집중을 하고, 한편으로 교회의 실무를 맡길 만한 일곱 명의 집사를 세우게 되는데, 여기에는 예수님의 부활 후 첫 순교를 하게 되는 스데반 집사와 함께 ‘니골라’라는 이름이 등장합니다.

‘니골라’라는 이름은 성경 전체 중에서 이 요한계시록 2장에 등장하는 두 번의 ‘니골라 당’이라는 이름을 제외하면 여기 사도행전 6장 5절에 단 한 번 나올 뿐이거든요.

그래서 일부 신학자들은 안디옥 사람 니골라라는 인물이 처음에는 충성된 제자였지만 나중에 배교해서 이단 집단인 ‘니골라 당’의 지도자가 된 것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이를 뒷받침할 만한 기록은 없어요. 그러니까 여기 나오는 ‘니골라 당’의 지도자는 스데반과 함께 세움을 받은 니골라와 전혀 다른 인물일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니골라 당’, 번역본에 따라서는 ‘니골라파’ 라고도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이를 미워한 것을 칭찬하시면서 예수님도 그들을 미워한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여기까지가 칭찬의 근거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제 다음에는 책망을 하세요.

요한계시록 2장 4절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에베소 교회를 향해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처음 사랑을 버렸다. 에베소 교회를 향한 책망의 근거는 이것 단 하나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권면의 말씀으로 이어집니다.

요한계시록 2장 5절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처음 사랑을 버렸는데 그 사랑이 어디에 떨어졌는지 생각하고 처음행위를 가지라고 말씀하세요.

우리가 생각하기에 칭찬의 근거에 비해서 책망의 근거는 상당히 추상적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말씀을 받은 에베소 교회 사람들은 주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는 지를 정확하게 알았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 편지를 보내시는데 칭찬하는 근거는 구체적으로 말씀하시면서 책망하는 근거를 추상적으로 지적하실 이유가 없기 때문이지요.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의 믿음생활은 어떻습니까.

여기서 한 가지 확인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예수님을 믿으시나요?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께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왜 믿습니까. 무엇을 바라고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성령충만? 은혜충만? 예, 하지만 더 솔직히, 꾸밈없이 말씀해 보세요. 도대체 예수님을 왜 믿으십니까.

돈 벌기 위해서요? 부자 되기 위해서요? 병이 낫고 싶어서요? 시험에 붙고 싶어서요? 취직하고 싶어서요? 출세하고 싶어서요?

예, 좋습니다. 성경에 보시면 구약이든 신약이든 수많은 기적을 통해서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 주신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한가지 예를 들어볼까요. 마가복음 10장을 보시겠습니다.

마가복음 10장 46절~52절
“46.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47.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48.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49.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하매
50.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51.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52.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이 말씀에 보시면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 바디매오 이야기가 나오지요.

그가 길가에 앉아 있었더니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주님을 부릅니다.

그는 맹인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정확히 어디에 계신 지 알 수가 없었어요. 그저 큰 소리로 외쳤을 뿐이었습니다.

주위에서 조용히 하라고 만류를 해도 막무가내입니다. 입을 다무는 것이 아니라 더욱 큰 소리로 주님을 향해 외쳤던 것이지요.

이를 들으신 예수님은 그를 부르십니다. 그러자 그는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님 앞으로 나왔다고 하지요.

여기서 ‘내버리고’라는 말은 단지 그 자리에 옷을 벗어 두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는 헬라어 ‘아포발로’라는 말이 사용되었는데 ‘발로’라는 말은 ‘던지다’입니다만 ‘아포’는 ‘멀리’라는 뜻을 가진다고 해요.

그러니까 바디매오는 단순히 옷을 벗은 게 아니에요. 옷을 벗고는 멀리 내던져버렸다는 것입니다.

46절에서 성경은 그를 가리켜 ‘맹인 거지’라고 기록합니다. 앞을 못 보는 것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가진 것이 없었다는 뜻이지요. 그런 그에게 있어서 속옷도 아니고 겉옷이라고 한다면 얼마나 소중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의 부름을 받은 순간 그 모든 것이 하찮은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그 때까지 애지중지 아끼던 겉옷을 말 그대로 헌신짝 내버리듯 미련 없이 저 멀리 내던져버리고는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게 된 것이지요.

그것도 어떻게요? 예, 뛰어 일어나 예수님께 나아갔다고 합니다.

자, 생각해보세요. 여러분께서 눈을 가리고 있다고 한다면 갑자기 뛰어갈 수가 있겠습니까. 뛰는 것은 고사하고 한 발자국 내딛는 것도 조심스럽겠지요.

하지만 그는 더 이상 두려워할 것이 없었습니다. 아니, 더 이상 지체할 시간도 이유도 없었습니다.

조금 늦으면 예수님이 떠나갈지도 몰라. 어서 빨리 가야 돼.

어쩌면 그는 여기저기 부딪쳤을지도 몰라요. 무언가에 걸려 넘어져 굴렀을지도 모릅니다. 몸 여기저기가 까져서 아파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오로지 예수님을 향해서 뛰어 왔다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그를 보시고 물으십니다. 네게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하느냐. 그러자 그는 망설임없이 말하지요.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님은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그러자 그가 곧 보게 되어서 예수님을 따랐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 것이지요.

자,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입니다. 이 마가복음 10장 46절~52절까지의 말씀 중에서 핵심은 어디입니까.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바디매오의 눈을 고쳐 주신 것만을 주목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은, 예수님께서 왜 바디매오의 눈을 열어 주셨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것은 바디매오가 눈이 열린 다음에 한 행동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마지막에는 어떻게 기록합니까.

마가복음 10장 52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앞을 보게 된 바디매오가 한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을 길에서 따랐다고 하잖아요.

여기서 ‘따르다’라고 하는 데에는 헬라어 ‘아콜루데오’라는 말이 쓰였는데, 이는 단순히 예수님 뒤를 따라간다는 뜻만이 아니라 ‘제자가 되다’는 뜻도 있다고 해요.

그렇다면 이제 앞서 드린 질문의 답을 알 수 있겠지요?

예수님께서 왜 바디매오의 눈을 열어 주셨습니까.

그것은 바로 맹인 바디매오로 하여금 예수님을 보게 하고, 예수님을 알게 하고, 예수님을 따르게 하기 위해서였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어때요?

예, 병만 낫기 위해서, 돈만 벌기 위해서, 시험만 붙기 위해서 예수님께 나옵니다. 그리고 병만 나으면, 돈만 벌면, 시험만 붙으면, 거기서 끝이에요. 더 이상 믿음이 성장하지 않습니다.

기도 응답을 받았을 때에는 할렐루야 하면서 마치 간이라도 빼 줄 것처럼 좋아하다가, 조금 지나면 이제 금새 식어버립니다. 믿음이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않아요.

그건 어떤 믿음입니까.

이는 그야말로 성탄절에 선물 준다고 하니까 교회에 갔다가 선물만 가지고 오는 믿음과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교회에서 선물을 주는 이유가 뭐예요?

돈이 남아 돌아서 줍니까. 그게 아니라 그것을 계기로 해서 예수님을 알게 되기를 소망하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기도를 하면 응답을 받지요. 하지만 그것이 최종적인 목적이 되면 안됩니다. 성경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호세아 6장 3절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크고 작은 응답을 받는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보게 하시기 위해서, 주님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 그리고 주님을 따르게 하시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돈 몇 푼 벌게 해주 실 정도밖에 안 되는 분이 아니에요. 이런저런 질병을 치료해주실 정도밖에 안 되는 분이 아닙니다.

그와 같은 것들은 신앙의 본질이 아니에요. 주님에게 있어서 그와 같은 것들은 그야말로 교회에서 나누어 주는 과자 부스러기 몇 개나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돈 몇 푼 벌었다고, 병이 좀 나았다고, 취직 좀 됐다고, 그 외에 기도제목 해결되었다고 이제 입 싹 씻고 멈추어 버린다는 것은, 마치 교회에서 주는 과자 몇 개를 먹고는 거기에 만족하고 더 이상 교회에 안 나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실 더 크고 놀라운 축복을 가지고 계세요.

그런데 거기서 멈추어 버린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주님에 대해서 알아야 해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주님을 알 수 있겠습니까.

그렇죠. 성경말씀을 통해서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유명한 신학자나 목사님의 말씀이라 하더라도 성경에서 벗어난 말씀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주님을 알기 위한 유일하고도 완전한 방법은 성경말씀을 아는 것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요즘 우리나라는 어떻습니까. 교회마다 말씀이 사라집니다. 맨날 돈 벌게 해달라고, 맨날 병 낫게 해달라고, 또는 맨날 마귀만 쫓는 교회가 늘어갑니다.

그리고 요즘은 또 목사라고 하는 사람들이 정치얘기에 열변을 토하고, 돈이나 세상적인 욕망에 몰두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어디를 찾아봐도 말씀이 없어요.

그런 것만 백날 해봐야 주님을 알 수 없습니다. 주님께로 가까이 갈 수가 없어요.

그러는 사이에 그와 같은 기존 교회에 이골이 나서 말씀을 공부하려는 사람들이 어디로 갑니까.

예, 많은 사람들이 이단 사이비 집단으로 빠져들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거기서 가르쳐주는 성경이 제대로 된 말씀입니까. 아니에요. 결국 따지고 보면 자신들의 교주만 신격화 하는 데에 몰두하고 있어요.

거기서 가르치는 것을 아무리 열심히 해봐야 엉터리입니다. 예수님을 볼 수도, 예수님을 알 수도, 그리고 예수님을 따를 수도 없어요.

오히려 돈과 재산만 탕진하고 인생을 망치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여러분의 처음 사랑을 어디에 버려 버리셨습니까. 여러분의 본래 신앙을 어디에 내팽개쳐 버리셨습니까.

버려야 할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무엇을 버리라고 말씀하십니까.

에베소서 4장 21절~24절
“21.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22.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버려야 할 것은 이 세상에서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버려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께서는 처음 사랑을 버린 에베소 사람들에게 권면의 말씀을 하십니다.

요한계시록 2장 5절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만약 그 처음 사랑의 행위를 도로 찾아오지 않는다면 주님은 촛대를 옮기신다고 말씀하세요.

그렇다면 촛대가 뭐라고 말씀하셨죠? 예, 교회입니다.

교회는 신앙에 있어서 교두보입니다.

교회가 세워진다는 것은 주님께서 그곳을 점령 하시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는 증거예요.

그런데 교회를 옮기시겠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바로 구원을 포기하시겠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처럼 무서운 말씀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마지막으로 에베소 교회를 향해서 약속의 말씀을 해 주십니다.

요한계시록 2장 7절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

주님은 우리를 부요하게도 해 주십니다. 질병을 치료해 주십니다. 소원을 들어 주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거기서 멈추면 안 됩니다. 거기서 만족을 하면 안 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생명나무의 열매를 약속해주시지 않았습니까.

생명나무 열매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는 에덴 가운데에 심어 주신 처음 선물입니다.

창세기 3장 22절 말씀에 의하면 이를 먹는 날에는 영생을 얻을 수 있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담과 하와는 불순종이라는 죄를 범함으로 인하여 그 열매를 얻는 축복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처음 사랑, 처음 믿음, 그리고 처음 행위를 회복함으로 인하여 주님께서 처음으로 주신 그 크고도 놀라운 축복을 얻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지막으로 바디매오 이야기를 조금 더 하고 마쳐볼까요?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는 겉옷을 멀리 내던져버리고 맹인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로 달려갔습니다.

그러고는 나음을 받았지요. 이제 앞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라면 그 다음에 무엇을 했을 것 같습니까. 감사의 말씀? 아니, 그거 다 하고 난 다음에, 예수님을 따르기 전에 무엇을 했을 것 같으십니까.

어쩌면 저는 그랬을지 몰라요. “어? 내 겉옷. 어디 갔지?” 그러면서 아까 내던져버린 그 겉옷을 찾으러 가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지요. 그렇잖아요. 가난한 바디매오에게 있어서 겉옷은 그야말로 재산목록 1호 아니었겠습니까.

그러나 성경 어디를 보아도 앞을 보게 된 바디매오가 방금전 내던져버린 겉옷을 찾으러 갔다는 말씀이 없어요.

그 이유는 뭐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겉옷보다도 훨씬 더 갚진 예수님을 발견하게 되었기 때문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여러분께서는 예수님을 따르시겠습니까. 아니면 겉옷을 찾아 나서겠습니까.

그 옷이 아무리 명품이라고 해도 그깟 겉옷과 예수님을 어떻게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주님을 더욱 더 알아 가며, 우리 안에서 처음 믿음, 처음 사랑, 처음 행위를 회복하여 주님을 끝까지 따름으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우리를 위해 예비해 주신 크고 놀라운 축복을 모두 받게 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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