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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1장 11절~20절
“11.이르되 네가 보는 것을 두루마리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등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12.몸을 돌이켜 나에게 말한 음성을 알아 보려고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13.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14.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15.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
16.그의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
17.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18.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19.그러므로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20.네가 본 것은 내 오른손의 일곱 별의 비밀과 또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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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요한계시록 순수강해 13번째 시간으로서 “주님의 말씀을 받기 위하여”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지난 주는 ‘주님의 음성을 듣기 위하여’였지요? 오늘은 ‘주님의 말씀을 받기 위하여’입니다.
밧모섬에 있는 요한……이 계시록을 기록한 요한에 대해서는 그가 정확히 누구인지 신학자들 사이에 있어서 완전한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다고 제가 예전에도 말씀 드렸습니다.
일반적으로는 사도 요한이라고 일컬어지고 있습니다만, 적어도 성경에는 그가 사도요한인지 아니면 다른 요한인지를 뒷받침할 만한
명문화된 기록이 없어요.
따라서 이번 계시록 순수강해에서는 이 요한에 대해서 편의상 ‘밧모섬의 요한’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음성을 들은 사람은 분명 밧모섬의 요한입니다. 그는 어느 날 문득 음성을 듣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 음성의 주인공을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선 18절을 보시겠습니다.
요한계시록 1장 18절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죽음을 이기고 살아나신 분은 단 한 분이시지요.
그 분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도 있지 않느냐고 하실 지 모르겠습니다.
예, 요한복음 11장에 의하면 그는 죽었으나 예수님의 능력으로 다시 살아났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완전한 부활이 아니지요.
그 때는 살아났으나 영생을 하는 것은 아니지요. 결국 수명이 다 하면 다시 사망했을 것입니다. 그 증거로 지금까지 그 나사로가
살아있지 않잖아요.
하지만 이 본문에서 말씀하시기를 죽었다가 살아나서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와 같은 분은 오로지 예수님 밖에는 안 계시다고 할 수 있겠지요.
나사로는 죽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도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11절을 봅니다.
요한계시록 1장 11절
“이르되 네가 보는 것을 두루마리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등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예수님께서 밧모섬의 요한에게 말씀하시기를 에베소를 비롯한 일곱 교회에 편지를 보내라고 명하십니다.
위치상으로 본다면 이 일곱 교회들은 에게해를 사이에 두고 밧모섬에서 볼 때 동쪽에 있는 소아시아, 지금으로 본다면 튀르키예 쪽에
있습니다.
신학자들에 의하면 각각의 교회는 단일교회가 아니라 그 지역에 있는 일대 교회를 가리킨다고 바는 것이 일반적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에베소 교회나 서머나 교회라고 해서 그 이름을 가진 하나의 교회가 아니라, 에베소 지역에 있는 교회, 서머나 지역에 있는
교회라는 식으로 해당 지역에 있는 교회에 보낸 서한이라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일곱 교회를 택하신 것일까요.
생각해볼 수 있는 점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결과적으로 본다면 이 일곱 교회에게 보내는 편지 내용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고
하는 계시와 일치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7’이라고 하는 숫자는 성경 해석에 있어서 완전수라고 여겨지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완전수인 일곱 교회를 향해 말씀을 하고 계신 이유는, 단순히 2천년 전의 그 일곱 교회 또는 일곱 지역에 있는 교회 만을
대상으로 말씀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 당시의 모든 교회, 나아가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모든 교회와 장차 새롭게 태어날 모든
교회를 향한 말씀이라고 우리는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다음으로 본문 12절부터 16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1장 12절~16절
“12.몸을 돌이켜 나에게 말한 음성을 알아 보려고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13.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14.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15.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
16.그의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
여기서는 이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에 대해서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단순히 ‘예수님’이라고 하면 될 텐데 왜 이렇게 긴 설명문으로 묘사된 것일까요.
자, 성경에서 편지라고 하면 떠올리는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바울서신이라고 하겠지요.
바울서신은 두 종류로 나누어지는데 그것은 교회서신과 개인서신입니다.
이 중에서 교회서신에는 대표적인 특징이 있어요.
그것은 바로 대부분의 교회 서신의 서두에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 또는 사도된 바울 등으로 소개하고 있다는 점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는 그 서한이 단순히 바울이 보내는 개인적인 편지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종 또는 사도라는 입장에서 보내는, 말하자면 공문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 본문에 기록된 내용을 본다면 이 12절에서 16절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에 있어서 세부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각 교회에게 보내진 편지를 공부하면서 자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만, 이처럼 다양한 모습으로
묘사된 이유는 분명히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제부터 각 교회에 편지를 보내도록 명하시는 분은 단순한 개인이 아니라 각 교회로 편지를 보내기에 합당한 권위를
가지신 분이라는 점을 분명히 나타내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또한 14절 전반부 말씀 보실까요.
요한계시록 1장 14절 전반부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이 구절에서의 예수님에 대한 묘사를 보면 머리털이 흰 양털 같다고 되어 있습니다만, 성경에 보면 이와 같은 묘사는 여기 외에 딱
한 군데 나옵니다.
다니엘 7장 9절
“내가 보니 왕좌가 놓이고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좌정하셨는데 그의 옷은 희기가 눈 같고 그의 머리털은 깨끗한 양의 털 같고
그의 보좌는 불꽃이요 그의 바퀴는 타오르는 불이며”
이 다니엘 7장에 나오는 말씀은 심판을 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기록이라고 할 수 있는데, 말하자면 지금 밧모섬의 요한에게 말씀하고
있는 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권세를 가지고 말씀을 전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지요.,
자, 여기서 흥미로운 점을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하겠습니다.
밧모섬의 요한이 이 음성을 들었을 때의 상황에 대해서 17절 전반부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장 17절 전반부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이 부분에 대해서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그리 주목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어느 한 주석서에 의하면 이를 두고 계시를 받았을 때 흔히 일어나는 모습이라고 설명하고 있어요.
하지만 그게 사실일까요?
관주성경이나 주석서에서 이 부분에 대해 인용한 관련 구절을 간략하게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여호수아 5장 14절
“그가 이르되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 대장으로 지금 왔느니라 하는지라 여호수아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절하고 그에게 이르되
내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
다니엘 8장 17절
“그가 내가 선 곳으로 나왔는데 그가 나올 때에 내가 두려워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매 그가 내게 이르되 인자야 깨달아 알라 이
환상은 정한 때 끝에 관한 것이니라”
다니엘 10장 9절~10절
“9.내가 그의 음성을 들었는데 그의 음성을 들을 때에 내가 얼굴을 땅에 대고 깊이 잠들었느니라
10.한 손이 있어 나를 어루만지기로 내가 떨었더니 그가 내 무릎과 손바닥이 땅에 닿게 일으키고”
다니엘 10장 15절
“그가 이런 말로 내게 이를 때에 내가 곧 얼굴을 땅에 향하고 말문이 막혔더니”
사도행전 26장 14절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말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신학자들이나 주석가들이 이 말씀과 유사하다고 한 구절 중에서 그나마 관련성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부분들을 추출해보았습니다만
어떻습니까.
17절 전반부도 이 말씀들과 비슷하게 느껴지시나요?
이 시점에서 다시 한번 17절을 보시겠습니다.
요한계시록 1장 17절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우리가 살펴본 것 외에도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사자를 만났을 때에 놀라거나 두려워하여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다는 등의 표현은
나옵니다만, 어디에도 “죽은 자 같이 되었다”는 말씀은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17절에서는 분명히 ‘죽은 자’를 뜻하는 헬라어 ‘네크로스’라는 말이 쓰였거든요.
예수님께서는 그 음성을 듣고 죽은 자 같이 되었던 밧모섬의 요한을 일으키시면서 뭐라고 하십니까.
요한계시록 1장 18절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여기서 주님께서는 나 또한 죽었다가 살아있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이 장면을 단계적으로 본다면 이렇게 되겠지요.
먼저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모습을 보고는 죽은 것 같이 되었다가 주님께서 다시 살리십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도 말씀하시시기를 나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고 하시고는 말씀을 이어 가십니다.
이야기의 맥락상으로 본다면 시각에 따라서는 불필요한 장면일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이 장면이 들어가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자 이사야서가 떠올랐습니다.
이사야 6장 6절~7절
“6.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7.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에게 말씀을 전하게 하시기 전에, 스랍 천사로 하여금 숯이 입에 닿게 함으로써 악을 제하시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악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는 그 입에서 악이 제하여져야 했듯이, 죽음에서 살아난 예수님의 계시를 전하기
위해서는 밧모섬의 요한 역시 죽음에서 살아나는 과정을 거쳐야 한 것이 아닌가 하는 마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서 전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그 준비를 위해서는 우리 또한 죽음에서 부활하는 과정을 겪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물론 진정한 죽음에서의 부활은 주님이 오신 날에 이루어지겠지요.
하지만 그 이전에도 우리는 주님과 함께 부활하기 위해서 주님과 함께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6장 8절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사람마다 존경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가 있지요.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존경하는 마음만 갖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로마서는 우리가 예수님과 죽었으면 또한 예수님과 함께 살 줄도 믿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를 뒤집어서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수님과 함께 살기 위해서는 예수님과 함께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3장 15절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베드로전서 2장 21절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기간 동안에 그 삶을 통해서 우리에게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이유는 단순히 예수님께서 자신을 높이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본을 따라 우리로 하여금 따라오도록 하시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본을 보여주신 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죠. 그것이 바로 십자가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제자가 스승의 발을 씻어 줍니다. 이 세상에서는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고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을 미워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요한복음 13장에서는 스승 중의 스승, 아니, 왕 중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미천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로마서 5장 8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의인이 아닌 당장이라도 죽어 마땅한 죄인들을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기도 바쁜데 어떻게 나를 미워하는 원수를 사랑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제 내가 죽었다.
그리고 예수님 안에서 내가 다시 살아났다.
이제 나는 나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위해 사는 것이라고 믿으면 우리 이웃만이 아니라
원수 또한 사랑할 수 있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우리 안에 아직도 내가 죽지 않았습니까. 내가 죽는다는 것, 그게 쉬운 일이겠습니까. 어렵죠. 사실 그게 쉬운
일이겠습니까.
하지만 그럴 때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내 자존심이 꿈틀거릴 때마다 피범벅이 되어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그 얼굴을 한 번 떠올려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얼굴로 십자가 위에서 나를 바라보시면서 “내가 이렇게까지 했는데 너는 그 정도를 해줄 수 없겠느냐”하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 보시기를 원합니다.
이제 우리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본을 따라 나설 때에 진정으로 주님의 말씀을 받아, 나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위해
사는 진정한 믿음의 첫걸음을 내디딜 수 있게 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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