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7회 [요한계시록 제11회] 환난과 나라 그리고 참음 (3) - 이루리라교회
 

홍성필 목사
이루리라교회
www.이루리라.com
mail@IRURIRA.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장 9절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설교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십일조, 감사헌금, 개척후원, 선교후원
온라인 후원
KB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이루리라교회 후원 안내 : www.후원.com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요한계시록 순수강해 11번째 시간으로서 “환난과 나라 그리고 참음 (3)”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지금까지 두 번에 걸쳐서 환난과 나라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만, 이제 오늘은 미자막으로 참음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른바 교회에서 믿음이 좋다고 하시는 분들, 주일도 빠짐없이 지켜요.

기도도 많이 합니다. 말씀도 많이 알아요. 그런데 가장 힘들어 하는 것이 바로 이 참음, 그렇죠. 인내입니다.

성경에 보시면 참음에 대해서 아쉬운 사람들과 성공한 사람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우선 그와 같은 사람들에 대한 실제 사례를 검토한 다음에 왜 참음이라고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인지를 앞서 살펴보았던 환난과 나라와의 관계를 통해서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아쉬운 사람들부터 볼까요?

첫째로 살펴볼 사람은 바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입니다.

창세기 12장 4절에 의하면 하나님께서의 부름에 응해서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길을 나섰을 때의 나이가 일흔 다섯이었습니다. 그 때도 충분히 나이가 많았지요.

그는 노년에 이르기까지 후사가 없었어요. 이제 나이도 많고 인생도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생각해서였을까요. 그는 더 이상 욕심이 없었습니다.

창세기 15장 2절~3절
“2.아브람이 이르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
3.아브람이 또 이르되 주께서 내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으니 내 집에서 길린 자가 내 상속자가 될 것이니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15장 5절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마음을 아시고 후사만이 아니라 셀 수 없을 정도의 자손을 주시겠다고 하세요.

아브라함과 사라의 나이 차이는 열 살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불음에 대하여 하란 땅을 출발했을 때가 칠십 오세였으니 사라는 육십 오세였지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많은 자손을 주시겠다고 하신 것이 정확히 어느 시점인지는 불분명합니다만,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제 모든 것을 버리고 나선지 10년이 됐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아이가 생기지 않아요. 하나님은 주시겠다고 했는데 감감무소식입니다. 그래서 초조했겠지요.

사라는 남편 아브라함에게 말합니다.

창세기 16장 1절~3절
“1.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출산하지 못하였고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
2.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3.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데려다가 그 남편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주한 지 십 년 후였더라”

이 때는 아직 이름이 아브람과 사래였습니다만 하나님께서 나중에 창세기 17장 5절과 15절에서 이름을 아브라함과 사라로 바꾸어 주시죠? 그래서 편의상 호칭을 아브라함과 사라로 하겠습니다.

사라는 말합니다. 이제 가나안 땅에서 산지 10년인데 주신다고 하신 아들을 아직 안 주시지 않느냐. 그러니까 이대로 있어 봤자 괜히 시간만 지나는 꼴이 되니, 그러지 말고 내 여종과 사이에 아이를 낳으라고 말하지요.

저는 이 부분에 대해서 인간적으로 보았을 때 사라가 무조건 나쁘다고 여겨지지는 않습니다.

생각해보세요. 10년이 보통 세월입니까. 10년 정도면 기다릴 만큼 기다렸잖아요?

그런데 아이는 생기지도 않고 하나님은 밤중에 하늘을 보라고 말씀하시고는 그것이 끝이에요.

당시는 성경도 없어요. 그러니 참고할 만한 기록도 없고 선례도 없습니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 사라는 어쩌면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비록 내가 아니더라도 내 여종을 통해서 아이를 갖게 된다면 그것도 내 아이나 마찬가지 아니냐. 어쩌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지도 몰라.

사실 이는 지금도 그런 경우가 종종 있지 않습니까.

아무리 기도를 해도 응답을 받지 못해요. 그런 경우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오히려 정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하지만 이는 대단히 큰 잘못을 범하게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는 그렇게 오랫동안 아이가 생기지 않았는데, 사라의 여종 하갈은 금새 임신을 했습니다.

사라는 어쩌면 이를 보고 아하, 역시 이게 하나님의 뜻이었어, 하고 확신했는지도 모르지요.

정말로 그게 사실이라면 모든 것이 원만하게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실제로는 어땠습니까.

창세기 16장 4절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임신하매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그의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주인과 종의 관계는 결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습니다만, 주인은 아이를 갖지 못하고 자기가 그 대신 주인 남편의 아이를 갖게 되자 교만이 하늘을 찔러요.

결국 이 일로 인해서 가정에 분란이 생깁니다. 창세기 16장 6절에 의하면 사라가 하갈을 학대하니까 하갈이 도망갔다가 다시 들어가고 하는 일들이 생겨요.

그럼 그것으로 끝인가 하면, 아니요, 이제 시작에 불과합니다.

창세기 16장 16절
“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에 아브람이 팔십육 세였더라”

이스마엘이 태어났을 때 아브라함이 팔십 육세라고 한다면, 말이 되지요. 하란 땅을 떠나 가나안에 살기 시작한 것이 아브라함이 75세 때부터이고, 10년 뒤인 85세 때 사라가 자신의 여종 하갈을 아브라함에게 주었다고 한다면 이스마엘은 그로부터 1년 뒤에 태어나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정확하게 맞습니다.

시간은 흘러가고 이스마엘을 무럭무럭 자라가는데 정작 자신에게는 아이가 생기지 않았더니 마침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이듬해 아들을 주실 것을 말씀하세요.

창세기 17장 19절에 의하면 그 아들에게 ‘이삭’이라는 이름까지 지어 주십니다.

이스마엘이 태어난 것이 16장이고 내년에 이삭이 태어난다는 말씀을 주신 것이 17장이라고 한다면, 그 사이가 1년이나 2년 정도일까요? 아니요.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 아브라함의 나이가 86세였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이삭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은 창세기 17장 1절에 의하면 아브라함이 99세 때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창세기 21장 5절에 의하면 이삭이 태어날 때 아브라함의 나이는 백 세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이삭을 얻은 것이 가나안 땅에서 살기 시작한지 25년 뒤, 이스마엘이 태어난 지 14년 뒤에 일어난 일들이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적자는 정식 아내인 사라 사이에서 태어난 이삭입니다. 그러나 이스마엘도 아브라함의 아들임에는 분명하잖아요.

그들 사이에는 열 네살이나 차이가 있습니다. 어릴 때에는 1년 차이만 나더라도 큰데 14년이라고 하면 그야말로 엄청난 차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만약에 이스마엘의 어머니이자 사라의 여종 하갈에게 지혜가 있었다면, 자기 아들 이스마엘에게 말하기를 이삭을 사랑하고 사이 좋게 지내라고 가르칠 수도 있었겠지만, 아무리 자기 주인이라고는 해도 자신을 학대한 사라를 좋게 볼 수가 있겠어요?

그러니 이스마엘에게 있어서도 이삭에 대해서 좋게 얘기했을 리도 없겠지요.

더구나 이스마엘에게 있어서도 이삭이 없었다면 자기가 아브라함의 후계자가 되었을 텐데 ,이삭이 태어나는 바람에 자기 지위는 후계자가 아닌 서자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되자 집안은 점점 더 어지럽게 됩니다.

창세기 21장 9절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아들이 이삭을 놀리는지라”

개역개정 성경에는 ‘놀린다’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열 네살 정도의 나이차이라고 한다면, 이삭이 유치원생이면 이스마엘은 대학생입니다. 서로 같이 장난칠 정도가 아니잖아요.

한 주석서의 의하면 여기서 ‘놀리다’라고 하는 히브리어 ‘메차헤크’라는 말은 단순히 장난치는 정도가 아니라 멸시하다 또는 핍박하다는 뜻이 담겨져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스마엘은 나이도 어리고 저항도 못하는 어린 이삭을 아주 못살게 굴었다는 뜻이겠지요.

이렇게 일들이 꼬여 가니까 창세기 21장 10절에서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쫓으라고 호소하기에 이르고, 아브라함은 결국 14절에서 그들을 내보내게 됩니다.

이 일이 거기서 끝난 것 같습니까. 아니요.

사라는 이런 이유로 하갈과 이스마엘을 미워했다고 하지만, 그렇다면 하갈 쪽에서는 어떻겠어요. 당연히 억울해 하는 감정이 쌓여가지 않겠어요?

지금도 보면 어떻습니까.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에 전쟁이 이어지고 있잖아요. 하마스는 이슬람의 무장단체입니다만, 이스라엘은 이삭의 자손이고 이슬람 사람들은 이스마엘의 후손이에요.

신학자들은 아브라함이 살았던 시대를 대략 기원전 2000년 전후로 보고 있는데, 그렇다면 지금으로부터 4천년 전의 일이잖아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삭과 이스마엘의 후손 사이에 있어서 여전히 참혹한 다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는 기간이 10년이요? 20년이요? 예, 길지요. 얼마나 길겠습니까.

그러나 그 기다림을 견디지 못했던 대가는 너무나도 크지 않습니까.

만약에 사라가 조금만 더 인내심을 가지고 믿음으로 견뎠더라면, 역사적으로 계속되어 온 이스라엘과 이스마엘 자손들 사이의 대립은 없었겠지요.

하지만 자기의 생각을 마치 하나님의 생각으로 오해하면서 그 기간을 참음으로 이겨내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4천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참상은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부리는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자, 그럼 다음으로 사울 이야기를 해볼까요.

그는 아무런 공로, 그야말로 단 하나의 공로도 없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초대 왕이라고 하는 놀라운 영광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을 너무나도 몰랐습니다.

사무엘상 13장에 의하면 전쟁을 앞두고 사울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로 한 사무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무엘상 13장 8절~9절
“8.사울은 사무엘이 정한 기한대로 이레 동안을 기다렸으나 사무엘이 길갈로 오지 아니하매 백성이 사울에게서 흩어지는지라
9.사울이 이르되 번제와 화목제물을 이리로 가져오라 하여 번제를 드렸더니”

성경에 구체적인 기록은 없습니다만 이 구절로 미루어 본다면 사무엘은 이레 그러니까 7일 동안 기다리라고 사울에게 말했음이 분명합니다. 예, 7년도 아니고 7개월도 아니고 7일, 1주일을 기다리라고 했어요.

그런데 그것을 기다리지 못했습니다. 왜 일까요.

사울이 생각하기에 지금 당장 전쟁을 하면 이길 것 같은데 아직도 안 와요. 하루 이틀 지나니까 전쟁을 하려고 모인 사람들의 사기가 떨어지겠지요? 그러니까 흩어져버립니다.

그러자 어떻게 했어요? 예, 마음이 다급해집니다. 그러니 사무엘을 기다리지 못하고 자기가 왕이라고 해서 스스로 번제를 드려버리고 맙니다.

그랬더니 마침 그 때 사무엘이 드디어 도착했어요. 그러고는 사울이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말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요.

사무엘은 사울에게 말합니다.

사무엘상 13장 13절~14절
“13.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리하였더라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원히 세우셨을 것이거늘
14.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령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여호와께서 그를 그의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셨느니라 하고”

7일, 아니, 성경 기록을 보면 거의 다 기다렸어요.

10절에 의하면 번제를 마치자 사무엘이 도착했다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조금만 더 기다렸더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을 것이요, 전쟁에도 승리했을 것이요, 그리고 사울의 후손들이 이스라엘을 왕으로서 대대로 다스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 그 짧은 시간을 기다리지 못해서 결국 그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되고 말았던 것이지요.

사라와 사울은 기다림이라고 하는 참음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 생각이 아니라 자기 생각을 하나님 생각보다 앞세웠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당시는 별 것 아니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그 대가는 어마어마하지 않습니까.

사라의 판단 착오는 수 천년에 걸친 다툼을 일으키게 만들었으며, 사울의 교만은 이스라엘의 영원한 왕이라는 자리를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리고 만 것이지요.

자, 그러면 반면에, 기다림이라는 시련을 현명하게 이겨낸 사람들에 대해서도 살펴보아야 하겠지요?

그것은 바로 지금까지도 환난과 나라를 공부하면서 많이 살펴본 두 인물, 요셉과 다윗입니다.

요셉은 나이 열 일곱에 아무런 잘못 없이 남의 나라 애굽으로 팔려가 종살이를 하다가 끝내는 억울하게 감옥살이까지 하는 신세가 되고 맙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적으로 본다면 인생 끝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요셉은 끝까지 소망을 놓지 않습니다. 그는 종살이를 할 때에도 감옥살이를 할 때에도 자신에게 주어진 책무를 성실하게 수행하는 모습을 볼 수 있지요.

창세기 40장에 보시면 흥미로운 기록이 나옵니다.

여기에는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이라는 인물들이 나오는데, 이 사람들은 그렇다고 그저 식당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아니에요.

요셉이 갇혀 있던 곳은 창세기 39장 20절에 의하면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이라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그들은 비록 죄수의 신분이기는 했으나 그저 흔한 잡범들이 아닌 정부의 고위관리, 더 나아가서 지체 높은 왕의 최측근이라고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루는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이 꿈을 꾸었다고 하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능력을 주셔서 그 꿈에 대해서 해몽을 해줍니다.

창세기 40장 12절 이하에 의하면 술 맡은 관원장은 사흘 뒤에 감옥에서 풀려나 복직이 될 것이라고 말해주지요. 그러면서 요셉은 그에게 당부를 합니다.
 
창세기 40장 14절~15절
“14.당신이 잘 되시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아뢰어 이 집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
15.나는 히브리 땅에서 끌려온 자요 여기서도 옥에 갇힐 일은 행하지 아니하였나이다”

술 맡은 관원장은 이제 얼마 후 복직이 된다면 또다시 왕의 측근으로 근무하게 될 텐데 그렇게 되면 왕에게 내 사정을 좀 잘 말씀 드려서, 여기서 나갈 수 있게 해주세요. 그렇게 부탁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 요셉의 간절함, 정말 마음에 와 닿지 않습니까. 아무런 잘못 없이 팔려온 것도 서러운데, 거기에 죄수라니요.

이제 사흘이 지났습니다. 그러자 정말로 술 맡은 관원장이 풀려 났어요.

이제 그러면 요셉은 어떻게 됐겠습니까. 그렇죠. 이제 그가 바로에게 잘 말을 해주어서 자신을 석방시켜주는 날만 기다리고 있었지 않았겠습니까.

그렇다면 술 맡은 관원장은 곧바로 왕에게 말을 해서 요셉을 풀어주었나요?

창세기 40장 마지막 구절에는 놀라운 기록이 나옵니다.

창세기 40장 23절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를 잊었더라”

아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겠습니까.

이 관원장 나이가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래도 그 정도의 지위에 오를 정도면 두뇌도 명석하지 않겠어요?

그런데 자기에게 그토록 놀라운 꿈의 해몽까지 해준 요셉에 대해서 그리도 쉽게 잊어버리다니요.

이 사실을 알 리가 없는 요셉은 감옥에서 하염없이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겠습니다만, 하루가 지나고 한 달이 지나도 아무런 소식이 없습니다.

자, 이럴 때 여러분 같았으면 어떻게 하셨겠습니까.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인간적인 방법을 총동원해서 술 맡은 관원장에게 자신의 결백함을 전하고 빨리 나가게 해달라고, 어떻게 아직까지 나를 그대로 내버려둘 수가 있냐고 하소연이라도 한 마디 하려고 하지 않았겠어요?

하지만 요셉은 놀랍게도 묵묵히 기다립니다. 남들 같았으면 그 답답하고 절망스러웠을 기간을 참음으로 이겨냈던 것이지요.

자, 우리는 이 이야기의 결말을 이미 살펴보아서 알고 있지요?

어느 날 바로가 꿈을 꾸고는 그 의미를 알고자 하는데 아무도 해석하는 사람이 없어요.

그러자 창세기 41장 9절 이하에 의하면 그제서야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에 대해서 그가 꿈을 해몽해 주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내요.

그리고는 바로 앞에 서게 되는데, 이 일로 인해서 그는 나이 서른에 애굽의 총리로 인명 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공부한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그 이전에 술 맡은 관원장의 놀라운 기억력 덕분에, 요셉이 그보다도 훨씬 일찍 석방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는 자유인인 상태에서 감옥에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친위대장 보디발 집에서 종살이를 하던 중에 억울하게 갇힌 것이잖아요. 그런 상황에서 다시 감옥 밖으로 나오면 어떻게 됩니까.

예, 여전히 종입니다. 보디발의 아내 때문에 옥살이를 하게 되었으니, 석방되면 같은 집이 아니더라도 다른 집에서 역시 종살이를 하면서 평생을 살아갔겠지요.

다시 말해서 애굽의 총리가 되는 일은 절대로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 못하게 해 주신 덕분에, 당장은 감옥에서 나오지는 못했더라도 마침내 요셉은 애굽의 총리로 오를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다윗의 경우를 보실까요.

다윗에 대해서도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그는 하나님의 사람 사무엘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블레셋의 용사 골리앗도 물리쳤어요. 영적으로나 세상적으로나 이스라엘 왕이 될 만한 자격을 충분히 갖추었다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다윗을 시기한 사울은 그의 목숨을 노리기 시작합니다. 그 기간이 적게 잡아도 10년이 넘어가요.

그렇다면 다윗 입장에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내 목숨을 노리는 자는 원수잖아요.

그러면 그 원수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렇죠. 내가 당하기 전에 먼저 무찔러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는 두말할 필요가 없겠지요.

실제로 다윗에게는 사울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최소한 두 번은 있었습니다.

사무엘상 24장에서는 다윗이 숨어 있다고 하는 첩보를 들은 사울이 삼천 명을 이끌고 엔게디 광야로 갑니다.

갑작스럽게 이 소식을 접한 다윗과 측근들은 멀리 도망칠 수 없었기 때문에 그 인근에 숨었어요.

지금도 엔게디 쪽에 보면 여기저기에 굴들이 많이 뚫려 있거든요.

그런데 거기 도착한 사울이 문득 볼일을 보기 위해서 그 중의 한 동굴로 들어갔다고 하는데, 공교롭게도 그 굴에는 다윗이 측근들과 숨어 있었던 것이지요.

다윗과 그 일행은 무기를 들고 있었지만 그와 같은 일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사울은 완전히 무방비입니다.

마음만 먹는다면 단칼에 목숨을 빼앗을 수도 있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사무엘상 24장 4절~7절
“4.다윗의 사람들이 이르되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넘기리니 네 생각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 하니 다윗이 일어나서 사울의 겉옷 자락을 가만히 베니라
5.그리 한 후에 사울의 옷자락 벰으로 말미암아 다윗의 마음이 찔려
6.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고
7.다윗이 이 말로 자기 사람들을 금하여 사울을 해하지 못하게 하니라 사울이 일어나 굴에서 나가 자기 길을 가니라”

측근들은 다윗더러 사울을 죽이라고 하지만 다윗은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을 해하지 못하게 하고는 다만 사울의 겉옷 옷자락, 아마도 겉옷이니까 곁에 벗어 놓았나 보죠?

그 겉옷 옷자락만을 몰래 베었다고 하는데, 그것조차 마음에 찔렸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26장에서는 여기서도 사울이 다윗을 잡기 위해 삼천 명을 이끌고 다윗이 숨어 있는 광야로 쳐들어옵니다.

이에 대해 7절 이하에 의하면 다윗은 그의 신복 아비새와 함께 그날 밤에 사울이 머물고 있는 진영으로 잠입을 해요.

그랬더니 거기서는 사울과 그의 부하들이 모두 무방비 하게 잠을 자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이를 본 아비새는 당장에 사울의 목숨을 빼앗자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다윗은 만류합니다.

사무엘상 26장 9절~10절
“9.다윗이 아비새에게 이르되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 하고
10.다윗이 또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혹은 죽을 날이 이르거나 또는 전장에 나가서 망하리라”

사울이 나중에는 하나님을 버리고 자신의 사리사욕에 눈이 멀게 됩니다만, 사무엘상 10장 1절의 기록에 나와 있듯이 사울도 엄연히 하나님으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왕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름을 부으셨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친히 왕으로 세우셨다는 것을 의미 하잖아요.

하지만 그런 왕을 사람의 손으로 해친다는 것은, 이는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한다는 것이 되고 만다고 다윗은 이해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은 만약 하나님께서 합당치 않게 여기셨다면, 왕으로 세우신 하나님께서 스스로 치실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여기에는 그렇다면 무슨 의미가 담겨져 있을까요.

나중에 다윗이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만, 그에게도 위기가 있었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사건 중하나가 바로 그의 아들 압살롬에 의한 반역입니다.

사무엘하 15장에 의하면 다윗이 그의 아들 중에서 가장 사랑했던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킵니다.

이제 백성들의 민심이 압살롬에게 돌아갔다는 전령의 말에 다윗은 허겁지겁 광야 길로 도망을 치게 되지요.

어찌 되었건 당시에 압살롬이 예루살렘을 장악하고 다윗은 광야로 도피했다고 한다면, 압살롬은 뜨는 해요, 다윗은 지는 해 아니겠습니까.

어느 시대나 옛 권력이 위기에 처하게 되고 새 권력이 대두하게 되면 사람들은 새 권력 쪽으로 쏠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새 권력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는 옛 권력을 공격해서 새 권력에 갖다 바치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라고 하겠지요.

만약에 다윗이 스스로의 힘으로 반역을 일으켜 사울을 해치고는 왕위에 올랐다고 한다면, 다윗 역시 새 권력에 잘 보이려는 누군가에 의해 살해 되었을지도 모르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오랫동안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는 손을 대지 않는다고 하는 다윗의 법은 그 때에도 살아 있어, 젊은 날의 그의 인내는 마침내 스스로의 목숨을 살리는 일이 되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판단보다 자기 판단을 앞세우려는 것은 하나님보다 자기가 더 낫다고 생각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 얼마나 큰 교만입니까.

고린도전서 1장 18절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린도전서 1장 25절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성경에는 이와 같이 기록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들은 자기 생각, 자기 판단, 자기 지식, 자기 경험을 앞세우려고 해요.

그리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을 미련하다면서 비웃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제아무리 지혜롭다고 스스로를 높인다 한들 어느 누가 하나님을 이길 수가 있겠습니까. 사람의 힘으로는 1분 뒤의 일을 절대로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참음을 원하시는 이유, 여기에 대해서 성경은 너무나도 명확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디모데후서 2장 10절~12절
“10.그러므로 내가 택함 받은 자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그들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받게 하려 함이라
11.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12.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여러분, 참음은 아무나 할 수 없습니다. 때로는 힘들고 괴로울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이를 극복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지금의 참음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알았을 때 우리는 능히 이겨낼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 안에서의 참음은 공짜가 없습니다. 헛되지 않아요.

우리가 잠시 당하는 환난은 장차 애굽의 총리가 되는 길,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길이라고 배웠습니다.

그렇다면 그 길을 가야하지요. 어떻게 안 갈 수 있겠습니까.

그 길을 가는 것이 바로 믿음 안에서의 참음입니다. 인내인 것이지요.

로마서 8장 18절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믿음 안에서 우리가 당하고 있는 현재의 고난과 그에 대한 참음은 왕 노릇 하는 길, 하나님의 유업을 받아 하나님과 함께 왕으로서 다스리기 위한 길로 이어지게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사실을 모르면 우리는 낙심하고 좌절하고 절망하고 포기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알면 우리는 능히 하나님께서 주시는 큰 상을 차지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나라를 차지하기 위한 환난을 참음으로 이겨냄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주님께서 주시는 크고 놀라운 상을 한 사람도 빠짐 없이 모두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루리라교회 / IRURIRA MISS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