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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요한계시록 순수강해 9번째 시간으로서 “환난과 나라 그리고 참음 (1)”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요한이 등장합니다. 이로 보아서 이 계시록의 기자는 요한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요한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이미 말씀을 드린 바 있지요.
대부분은 사도 요한이라고 알고 계십니다만, 사실 그렇게 100프로 장담할 수가 없습니다.
신학자들 사이에 있어서도 이 기록의 저자가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 한 사람인 사도 요한이라고 하는 데에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거든요.
이 점에 대해서 사도 요한이라고 주장을 하든 아니면 다른 요한이라고 주장을 하든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여러 사료나 기타
신학자들의 견해를 들기도 합니다만, 분명한 것은 뭐냐 하면 성경 어디에도 여기에 기록된 요한이 사도 요한이라는 말씀은 없습니다.
성경에 기록이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 왜 이에 대한 기록이 없어 가지고 신학자들로 하여금 다투게 만드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확실합니다.
그것은 바로 그 사실, 그러니까 여기에 나오는 요한이라고 하는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점은 복음의 본질과 별로 상관이 없기 때문인
것이지요.
이 요한이라고 하는 사람이 사도 요한이면 어떻고 세례 요한이거나 다른 요한이면 또 어떻습니까.
성경에 나와 있지 않는 것을 가지고 열심히 찾아다니는 학자들에 대해서까지 제가 뭐라고 할 마음은 없습니다만, 적어도 우리는 이
성경에 기록된 내용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들이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을 보시면 이 요한이라는 사람에 대하여 짐작할 수 있는 단서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을 증언함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조금 논란이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헬라어 원어 ‘디아’라고 하는 부분이에요.
이 ‘디아’라고 하는 말을 개역개정에서는 ‘말미암아’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다른 번역본에 보면 ‘위하여’라고 되어 있는 경우도
있어요.
이 차이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디아’를 ‘말미암아’ 또는 ‘때문에’로 번역을 하게 되면 요한이라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을 증언했기 ‘때문에’ 밧모섬에 있었다는 것이 됩니다.
말하자면 복음을 전했다는 이유로 밧모섬에 있었다는 뜻이라고 할 수 있기에 이를 미루어 짐작하자면 유배를 당하고 있었다고 이해할 수
있겠지요.
이에 따라 대표적인 한글성경들은 “밧모섬에 갇혀 있었다”, “밧모섬으로 추방되었다”는 식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외국어 성경들을 보면 이를 ‘때문에’가 아니라 ‘위하여’로 번역한 경우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요한은 “예수님을 증언했기 때문에”가 아니라 “예수님을 증언하기 위하여”가 되지요.
따라서 헬라어 ‘디아’를 ‘위하여’로 해석하게 된다면 이 계시록의 기자인 요한이라고 하는 사람은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밧모섬으로
끌려왔다기 보다는,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밧모섬으로 건너왔다는 뜻이 됩니다.
현재 신학계에 있어서 정설은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밧모섬으로 유배되었다고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만, 사실
이 또한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요한이라고 하는 사람이 현재 유배 중이든 아니면 복음을 전하는 중이든 간에 이 역시 본문 내용과는 그리 큰 차이가 없기
때문이지요.
지금도 밧모섬은 있습니다. 현재 그리스에 속해 있고 에게해에 있는 작은 섬이에요.
인구는 대략 3천명 정도이고 거기 가면 요한이 계시를 받았다고 하는 동굴이 있다고 하더라구요.
본문에는 동굴에서 계시를 받았다고 하는 기록이 없는데 왜 동굴이 있는지 모르겠어요. 아마도 무슨 전승이든지 그런 식이겠지요.
이 밧모섬, 지금은 파트모스 섬이라고 한다고 하는데, 이른바 성지순례라고 하면서 지금도 여기에 많은 사람들이 방문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여기에 가봤자 예수님이나 천사를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니요, 계시를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관광인 것이지요.
아무튼 이 요한은 자의든 타의든 간에 밧모섬에 머무르고 있을 때에 계시를 받게 됩니다.
이에 앞서 요한은 자신에 대해서 소개를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는 단순한 객관적인 소개가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언급이에요.
그는 말합니다.
요한계시록 1장 9절 전반부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요한이 말하기를 자신은 너희의 형제라고 해요.
여기서 ‘너희’라고 하는 것은 일차적으로는 나중에 나오는 일곱 교회에 있는 성도들을 가리키는 것이요, 나아가서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모든 성도들이라고 하겠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확인시켜주고 있지요.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인이란 예수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고 하는 점입니다.
자, 우리 모두 예수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 아멘, 감사합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진정으로 받기 위해서는 이 뜻을 제대로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가
되겠지요.
그래서 오늘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형제 자매로 거듭나기 위해서 이 그리스도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환난에 대해서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전도를 해보신 적이 있으리라 믿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말씀으로 전도를 하십니까.
예수님을 믿으면 모든 고통과 고난이 사라지고 만사형통, 모든 것이 다 내가 원하는 대로 된다. 그러니까 교회 가자……혹시 그렇게
전도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여러분, 이 말, 정말 맞는 말인가요? 예수님을 믿으면 고통과 고난이 사라지고 만사형통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집니까.
만약에 누군가가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성경에 그와 같은 사람을 한 사람이라도 대보라고 하세요.
노아나 아브라함, 야곱, 요셉, 모세, 다윗 등 성경에 등장하는 믿음의 선배들을 보시면 어떻습니까.
모두 다 고통과 고난을 안 겪었습니까.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만사형통이었나요?
노아를 보세요. 그는 135미터나 넘는 배를 적게 잡아 수십년 동안 만들어야 했습니다.
우리는 배라고 하면 대충 알지 않습니까. 직접 만들어보지 않아도 어느 정도 모양이나 구조은 알 수도 있잖아요.
하지만 성경에는 당시까지 배가 있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어쩌면 노아는 배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만들었는지도 몰라요.
그 뿐만이 아니지요.
창세기 7장 17절에 의하면 물이 많아진 다음에 방주가 땅에서 떠올랐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당시 그가 어디에 살고 있었는지는 기록에 나오지 않습니다만, 어쩌면 내륙에 배를 만들었는지도 모르지요.
사람들은 그를 보고 비웃었을 것입니다.
왜 이런 데에 그토록 큰 배를 짓느냐고 말이에요. 그러면 그는 말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러시는데 홍수를 일으켜서 땅에 있는 생명들을 멸하시겠다고 하셨어. 그러니까 당신들도 나와 함께 배를 만들어서
구원받자.”
하지만 사람들은 안 믿었겠지요.
그도 그럴 것이 홍수가 나려면 물이 많아져야 하는데, 당시까지는 배가 있었다는 기록 뿐만 아니라 비가 내렸다는 기록도 없거든요.
다만 창세기 2장 6절에 의하면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다고만 나와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비도 오지 않는데 어떻게 홍수가 나겠습니까. 그러니까 이 안개가 아무리 많이 올라온들 무슨 홍수가 나겠느냐 하고 사람들은
비웃었을 것입니다.
노아의 친인척들은 어쩌면 말렸을지도 모르지요. 제발 가문에 먹칠을 하는 그런 창피한 짓 좀 하지 말라고 아우성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노아는 끝까지 굴하지 않았습니다. 그 오랜 세월 동안 묵묵히 방주를 만들고는 마침내 구원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어떻습니까. 전승에 의하면 그는 아버지 동네에서 우상을 만드는 일을 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후사가,
말하자면 아들이 없었어요.
지금은 워낙 결혼을 늦게 하고 또 아이를 갖지 않은 것이 대단한 일은 아닙니다만, 당시에는 대단히 부끄러운 일이었다고 하지요.
창세기 12장 4절에 의하면 그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하란 땅을 떠날 때가 칠십 오세 였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서
인도해주시는 목적지가 어딘지도 모른 채 모든 것을 버리고 아내와 조카 롯을 데리고 함께 떠나요.
그가 바랐던 것은 후사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들어주어 이삭을 주시지만 그것은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그가 백 세 때의
일이었지요.
그 동안 그에게도 얼마나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까. 아내를 빼앗길 뻔한 위기가 두 번이나 있었고, 납치당한 롯을 구해내기 위해서
목숨까지 걸어야 했습니다.
한편 야곱의 경우를 보면, 그는 어떻게든지 자기 머리로 살아가기 위해서 발버둥을 쳤어요. 팥죽으로 형으로부터 장자권을 빼앗기도
하고,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형 에서에게 주어질 축복도 빼앗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었지요. 아니, 행복은커녕 형 에서로부터 쫓기는 신세가 되고 맙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형을 피해 도망간 작은아버지 라반의 집에서는 오랫동안 종살이나 다름 없는 고된 세월을 보내게 됩니다.
그에게는 아들 열 둘과 딸 하나가 있었으나 문제가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첫째 르우벤은 자신의 첩과 동침을 하게 되고, 딸 디나는 성폭행을 당하고, 그리고 이에 대한 복수를 한다면서 시므온과 레위는 그
성읍을 기습하여 학살을 자행합니다.
그에게는 아내 둘과 첩 둘이 있었는데 그 중 가장 사랑했던 아내 라헬은 일찍 세상을 떠나고, 그가 낳은 아들 둘 중 요셉은
형제들에 의해 노예로 팔려가지요. 하지만 야곱은 오랫동안 요셉이 죽은 줄로 알고 지내게 됩니다.
그렇다면 요셉은요. 창세기 37장 2절에 의하면 그는 고작 17살의 나이로 형들에 의해 애굽으로 팔려가게 됩니다.
그는 아무런 잘못이 없었어요. 다만 그를 시기했던 형들의 손에 의해 억울한 일을 당하게 됩니다. 억울한 일을 보자면 그것 만이
아니지요.
그는 애굽에서 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서 종살이를 하게 되는데 그 집 여주인의 악행으로 인하여 이 또한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게
됩니다.
그는 종으로 팔려갈 짓도 감옥살이를 할 만한 죄도 짓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환난은 닥쳐와요.
마침내 그가 감옥에서 나오는 날이 오는데, 창세기 41장 46절에 의하면 그것은 그의 나이 삼십 세 때. 억울하게 종으로 팔려간
지 13년이 지난 후였습니다.
모세도 그렇지요. 그는 이스라엘 자손이었으나 애굽 왕실에서 키워지게 됩니다. 사도행전 7장 23절에 의하면 모세는 그의 나이 사십
세에 자신의 민족을 위한다면서 사람을 해치게 되는데, 이로 인해서 그 때까지 누리고 있던 모든 영광을 다 버리고 혈혈단신 광야로
도망치게 됩니다.
그로부터 광야에서 쓸쓸하게 보내게 되는데 그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그로부터 무려 40년이 지난 후, 그의 나이 이미 80세가
되어 노년에 접어들었을 때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 애굽으로 가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끌어 내어 애굽을 탈출하게 되지요.
하지만 역경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기껏 400년 가까이 남의 나라에서 종살이를 하던 자기들을 구해내 주어 이제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려고 하는데, 허구한 날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원망합니다.
그런 사람들을 풀한포기 나지 않는 광야에서 40년 동안이나 인도한 것이지요. 이 얼마나 힘든 일이었겠습니까.
다윗도 평탄하지는 않았습니다. 사무엘상 16장에 의하면 팔 형제 중에서 막내인 그는 집에서조차 제대로 대우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서 기름을 붓고, 하나님께 불순종한 사울을 대신하여 왕으로 택함을 받게 되지요.
아직 전쟁에도 나가지 못하는 미성년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다음 장인 17장에서 그는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이스라엘의 숙적 블레셋
군대의 용사인 골리앗을 물리칩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공로입니까.
그렇다면 이제 이스라엘의 용사로 추앙을 받게 되는가 하면, 그렇지 않지요.
오히려 이제부터가 고난의 시작입니다.
사무엘상 18장 7절에서 보듯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며 백성들의 관심이 다윗에게 쏠리게 되니까 사울
왕은 다윗을 시기하여 끝내는 목숨까지 노리게 됩니다.
그러자 어떻게 되겠습니까. 다윗은 그를 따르는 몇몇과 도망을 치지요. 그 기간이 몇 년이냐 하면 적게 잡아도 10년 이상인
것입니다.
상대방은 한 나라의 국왕인 반면 다윗은 누구입니까. 예, 집에서도 제대로 대우를 받지 못한 양치기 집 막내 아들이에요.
다윗은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았어요. 그리고 골리앗을 물리치는 놀라운 공도 세웠습니다.
하지만 그러면 뭘 합니까. 사울 왕은 자신이 가진 막대한 군사력과 정보력을 바탕으로 혈안이 되어 다윗을 추격하니, 다윗으로서는
얼마나 불안했겠어요.
그렇다고 그 추격의 손길이 낮에만 오고 밤에는 안 오라는 법이 있나요. 아니면 평일에만 오고 주말에는 안 온다고 장담할 수
있습니까.
그러니 다윗은 10년 이상 1년 365일 24시간 동안 불안에 떨지 않는 시간은 없지 않았을까 합니다. 얼마나 고달프고
초조해겠습니까.
이처럼 믿음의 사람들을 보더라도 그들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환난의 시기가 오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와 같은 믿음의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왜 환난을 허락하셨을까요.
그것은 바로 거기에는 분명한 하나님의 목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사역을 통해서 인류에 대한 심판과 구원이라고 하는 놀라운 계획을 말씀하셨고, 우상으로 물든 땅에서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시고는 야곱을 통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번성하게 하셨습니다.
17살 요셉은 형들의 미움을 사서 애굽에 종으로 팔리게 됩니다. 애굽에서는 종살이를 하다가 누명을 써서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그
기간이 무려 13년이나 돼요.
하지만 그가 종살이를 했던 집은 그냥 집이 아닙니다. 바로 왕의 친위대장 보디발의 집이었으며 그가 갇혔던 감옥도 그저 잡범들이
있는 곳이 아닌 고위직들이 갇히는 감옥이었어요.
창세기 39장 4절에 의하면 종살이를 할 때에 보디발은 요셉을 총무로 삼아서 집의 모든 일을 주관하게 하였으며, 창세기 39장
22절에 의하면 감옥에 있을 때에도 간수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에게 맡기므로 제반 사무를 다 했다고 해요.
그냥 일반 사람 집도 아닌, 애굽 왕의 친위대장의 집이라고 하니 그 집의 규모가 얼마나 대단했겠습니까.
그런데 요셉은 그 집의 총무였다고 하니까, 비록 종살이었지만 요셉은 다른 종들처럼 허드렛일만 했던 것이 아니라, 집안 전체를
관리하면서 행정력을 익힐 수가 있었을 것이요, 감옥에 있을 때에는 비록 그들이 죄수이긴 했지만 감옥에 갇혀 있는 고위
공직자들로부터 애굽에 대한 고급정보와 지식에 대해서 학습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건 단순히 제 상상이 아닙니다. 13년이 지나고 마침내 때가 이르러 바로 왕 앞으로 불려 나가,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왕의
꿈을 해석하자 어떻게 됩니까.
창세기 41장 37절~43절
“37.바로와 그의 모든 신하가 이 일을 좋게 여긴지라
38.바로가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찾을 수 있으리요 하고
39.요셉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도다
40.너는 내 집을 다스리라 내 백성이 다 네 명령에 복종하리니 내가 너보다 높은 것은 내 왕좌뿐이니라
41.바로가 또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너를 애굽 온 땅의 총리가 되게 하노라 하고
42.자기의 인장 반지를 빼어 요셉의 손에 끼우고 그에게 세마포 옷을 입히고 금 사슬을 목에 걸고
43.자기에게 있는 버금 수레에 그를 태우매 무리가 그의 앞에서 소리 지르기를 엎드리라 하더라 바로가 그에게 애굽 전국을 총리로
다스리게 하였더라”
여기서는 바로가 요셉을 총리로 세웠다는 점만이 강조되기 쉽습니다만 중요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37절이에요.
창세기 41장 37절
“바로와 그의 모든 신하가 이 일을 좋게 여긴지라”
생각해보세요. 아무리 바로의 꿈을 완벽하게 해석했다고는 해도 그는 애굽으로 팔려온 노예예요. 뿐만 아니라 방금 전까지 감옥에 갇혀
있던 죄수입니다.
그런데 자기 꿈을 해석해준 바로는 그렇다고 쳐도, 어떻게 모든 신하가 그런 요셉이 한 일을 보고 좋게 여겼을까요.
이는 분명합니다. 그 자리에는 과거에 감옥에 갇혀 있다가 나온 사람들, 다시 말해서 요셉에게 신세를 졌던 사람들이 있었지
않았겠습니까.
그리고 자기는 감옥에 간 적이 없다 하더라도 요셉에 대해서는 이미 바로의 신하들 사이에서 소문이 자자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요셉이 바로 왕 앞으로 불려 나왔을 때, 그를 보는 신하들은 그가 노예나 죄수라고 해서 비웃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
저 사람이 그 소문으로 듣던 요셉이구나 하고 눈여겨보았을 지도 모르지 않겠습니까.
요셉은 종으로 팔려와서 죄수로만 살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바로 왕 앞으로 불려 나왔잖아요.
다른 사람 같았더라면 다리가 후들거려서 제대로 서 있을 수 조차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당당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바로 왕 앞에 설 모든 준비가 다 끝나 있는 상태였던 것이지요.
그 준비는 어느 정도였냐 하면 당장 오늘부터 애굽 총리를 맡기더라도 무엇 하나 손색없이 완벽하게 수행해낼 수 있을 정도였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어떻습니까. 그 고난의 과정을 거치면서 그는 전략과 전술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부하들을 이끌고 다니면서 용병술을
터득할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이로 인하여 그는 왕위에 오른 뒤에도 수많은 군대를 이끌고 전투에 나아서 놀라운 승리를 거둠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의 초석을 굳건하게
다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계획은 누구에 의해 만들어지고 짜여졌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철두철미하고도 완벽한 설계에 의해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고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 위한 훈련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는 그야말로 돈 주고도 못 배울 놀라운 교육과정 아니겠습니까.
어디에서 애굽의 총리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을 수 있을 것이며, 누구한테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 위한 훈련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 환난은 힘들고 고달프기만 한 고난이라고 여겨질지는 모릅니다. 물론 그런 고통과 고생은 세상에도 넘쳐나지요.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의 환난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고달프기만 하고 의미 없이 보인다 하더라도, 그 길은 애굽의 총리가 되는
길이요,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길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비밀을 깨달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것은 다름아닌 바울인 것입니다. 바울은 정말 참 대단한 인물이에요.
로마서 5장 3절~4절
“3.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여러분, 환난을 즐거워 하래요.
사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이게 정신이 온전한 사람의 말입니까. 환난은 괴로워하고 슬퍼하고 고통스러워 해야 하는 것 아니에요?
하지만 바울은 환난을 즐거워 하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를 이제 우리는 알겠지요?
그렇습니다. 주님 안에서 우리가 겪는 환난은 무엇이 되는 길이요?
예, 그렇죠. 애굽의 총리가 되는 길이요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길이라고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은 본문 말씀에 나오는 환난과 나라와 참음 중에서 주님 안에서의 환난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30절
“28.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세상에서의 환난과 주님 안에서의 환난은 다릅니다.
세상에서의 환난은 우리를 짓누르고 힘들게 하는 무거운 짐이지요.
그러나 주님께서 주시는 환난은 가벼운 짐이요, 장차 우리를 크게 높여 주시는 지름길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주님 안에서 어려움을 겪더라도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축복을 주시기 위해 철두철미하게 계획하신 하나님의 뜻이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님께 감사함으로 순종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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