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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요한계시록 순수강해 8번째 시간으로서 “오메가이신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알파와 오메가에 대한 설교 말씀을 들어 보면 항상 이 점부터 시작하지요?
헬라어에 있어서 알파는 첫 글자이고 오메가는 마지막 글자다.
예, 맞습니다.
특별히 이 알파와 오메가라는 부분에 대해서 이를 잘 이해할 수 있는 구절은 나중에 공부하게 될 22장 13절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은 미리 한 번 볼까요?
요한계시록 22장 13절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
오늘 본문은 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기록합니다만, 이 22장 13절 말씀은 전후맥락으로 보았을 때 예수님의 말씀이라고 볼 수
있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요한계시록에 보시면 말씀하시는 분이 오늘 본문처럼 하나님이라고 되어 있기도 하고 예수님이나 성령님 등으로 표현되는
경우가 있습니다만, 이는 모두가 다 삼위일체 하나님이라고 이해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창세기 1장 1절~2절
“1.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2.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요한복음 1장 1절~3절
“1.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이 말씀을 보시면 하나님과 하나님의 영 그러니까 성부하나님과 성령하나님께서는 태초부터 계셨고 성자하나님이신 예수님도 역시 하나님과
함께 태초부터 계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태초부터 계셨던 삼위일체 하나님은 시작만이 아니라 오메가 즉 마지막이기도 하시고 마침이라고도 하시지요.
자, 그렇다면 여러분께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알파와 오메가이신 하나님, 태초부터 마지막이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말씀을 여러분께서 들으시면 감사와 은혜가 넘치십니까.
아, 정말 알파와 오메가이신 하나님 감사합니다……라는 마음이 드십니까.
아니, 그냥 ‘아멘’하시지 마시고 잘 한 번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이 부분을 그냥 넘어가신다면 우리는 너무나도 귀한 보배를 놓쳐버릴 수도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왠지 은혜가 될 것 같다는 수준이 아니라, “알파와 오메가이신 하나님”에 대해서 믿지 않는 사람이나 아니면 주일학교 학생들에게 그
은혜에 관해서 설명하실 수 있을 정도로 이해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지요.
저도 처음에는 그저 이 말씀을 들었을 때,
“그래, 세상이 생기기 전부터 계셨던 하나님이시고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도 계시는 하나님, 정말 위대하신 하나님이다”라는 막연한
생각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생각만으로는 나 자신에게 전혀 은혜가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더 구체적으로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계신 하나님이라는 말씀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데?”라는 마음까지 들게 되었어요.
하지만 이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저는 너무나도 큰 은혜를 받게 되었기 때문에, 오늘은 이 제가 받은 은혜를 여러분도 넘치도록
받으시는 자리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낙심도 하고 좌절도 하고 절망도 하지요.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
물론 여러 이유가 있겠습니다만, 저는 그 근본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점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낙심하고 좌절하고 절망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단순히 어려운 일을 당해서요? 힘든 일을 당해서요?
아니요. 분명 그것 만이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똑같이, 아니 그보다도 더 힘들고 어려운 일을 당해도 소망을 가지고 다시 일어나는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깊은 절망 속에서 허덕이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뭐냐 하면 믿음이 없는 사람들 만이 아니라 믿음을 가진 사람들 중에서도 이와 같은 경우를 볼 수가 있다는
것이지요.
자, 다시 한 번 질문을 드립니다.
여러분, 낙심하고 좌절하고 절망합니다. 그리고 다시 일어서지 못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 이유는 바로 간단합니다. 우리가 오메가 즉 마지막을 모르기 때문인 것입니다.
어떤 안 좋은 일이 우리에게 닥쳐왔어요. 아주 힘들고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되었어요.
내 눈으로는 사방이 막혀 있고 내 귀에는 절망만이 들려오고 내 머리에는 한 가닥 소망조차도 보이지 않기 때문에 힘들어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결국 우리가 오메가 그러니까 마지막을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모든 것이 끝인 줄 알고 낙심하고 좌절하고 절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아도 그런 사람들은 많습니다.
출애굽기에 보시면 앞을 홍해가 가로막고 있고, 그 뒤에서는 애굽 군대가 추격해 오는 상황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에게
뭐라고 합니까.
출애굽기 14장 11절~12절
“11.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12.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그들의 불만은 그 뿐만이 아니지요. 배가 고프고 먹을 게 없다면서 그들은 모세와 아론을 원망합니다.
출애굽기 16장 2절~3절
“2.이스라엘 자손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3.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그리고 물이 없다면서 원망해요.
출애굽기 17장 3절
“거기서 백성이 목이 말라 물을 찾으매 그들이 모세에게 대하여 원망하여 이르되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
여러분,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예,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이시죠.
베드로후서 3장 9절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나님이 오래 참으시는 이유, 그것은 더 늦기 전에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회개하여 구원 받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이시지만 영원히 참으시는 분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홍해가 앞을 가로막고 있다고 해서 홍해를 갈라 주셨습니다. 먹을 것이 없다고 해서 만나를 내려 주셨습니다. 물이 없다고 해서
반석에서 물을 내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그 정도면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무엇을요?
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물에 빠져 죽이기 위해서 이끌어낸 것이 아니요, 광야에서 굶거나 목말라 죽이기 위해서 이끌어낸
것도 아니에요.
이는 무슨 누구한테 들어서 아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직접 눈으로 홍해가 갈라지는 것을 보았고 만나를 주시는 것도 물을 솟아나게
해주시는 것도 직접 보았잖아요. 그 정도면 어린 애라도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 모든 것이 무엇을 위해서입니까.
출애굽기 3장 8절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
그렇습니다. 남의 땅에서 억울하게 종살이를 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해 내어서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 가나안을
그들에게 주기 위해서라고 말씀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를 위해서 그 놀라운 열 가지 재앙을 애굽에 내리시고 그야말로 눈동자처럼 보호하시면서 인도하시고는 이제 가나안 땅 그 코앞까지
이끌어 오셨습니다.
하지만 끝까지 그들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았어요.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을 눈앞에 두고서는 모세만이 아니라 하나님도 원망합니다.
민수기 14장 2절~3절
“2.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3.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이렇게 되자 결국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께서도 노하십니다.
민수기 14장 11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많은 이적을 행하였으나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
민수기 14장 22절~23절
“22.내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내 이적을 보고서도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한 그
사람들은
23.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을 결단코 보지 못할 것이요 또 나를 멸시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그것을 보지 못하리라”
이처럼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반복해서 봐왔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하나님을 믿지 못했던 이스라엘 자손들 중에서 당시 성인이었던
광야 1세대들은 결국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풀한포기 나지 않고 모래바람 부는 광야에서 모두 다 죽어가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예, 그렇지요. 자기네들 머리로는 도무지 가나안 땅을 차지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은 거예요.
믿어지지가 않아요.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하는 오메가, 축복된 마지막이 안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요. 그렇습니다. 낙심하고 좌절하고 절망하면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결국은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을 정도까지
다가갔던 그 크고 놀라운 축복을 받지 못하고는 결국 죽음의 길로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열왕기하 6장 24절 이하에 보시면 아람 군대가 이스라엘 사마리아성을 포위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니 사마리아성은 극심한 식량난에 빠지게 되지요.
열왕기하 6장 25절
“아람 사람이 사마리아를 에워싸므로 성중이 크게 주려서 나귀 머리 하나에 은 팔십 세겔이요 비둘기 똥 사분의 일 갑에 은 다섯
세겔이라 하니”
여기에 보시면 당시 참상을 알 수 있는데, 먹을 것이 부족하니까 나귀 머리 하나에 은 팔십 세겔에 비둘기 배설물조차도 식량으로
거래가 되었다고 합니다.
먼저 나귀 머리에 대해서 살펴볼까요?
레위기 11장 4절에서는 다음과 같은 율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레위기 11장 4절
“새김질하는 것이나 굽이 갈라진 짐승 중에도 너희가 먹지 못할 것은 이러하니 낙타는 새김질은 하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하였으므로
너희에게 부정하고”
이 말씀을 뒤집어 보면 먹을 수 있는 것은 새김질을 하고 굽이 갈라진 짐승이라는 뜻이 되겠지요?
예를 들어서 소는 새김질도 하고 굽이 갈라져 있기 때문에 먹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밑에 7절에도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돼지는
굽이 갈라져 있기는 하지만 새김질은 하지 않기 때문에 당시에는 먹을 수가 없었어요.
그렇다면 말이나 나귀는 어떨까요.
나귀는 새김질도 하지 않고 급이 갈라져 있지도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적으로는 먹을 수가 없어요.
하지만 지금 굶어 죽게 생겼는데 율법이 문제겠습니까.
나귀의 다리나 몸통이 아니라 먹을 것이 별로 없는 머리도 거래가 되었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그게 얼마냐 하면 80세겔이라고 합니다.
당시 한 종의 몸값이 30세겔이었다고 하는데 80세겔이라고 하면 종 몸값의 세 배 가까이가 된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워낙 먹을 것이 없다 보니까 평소에는 쓰레기처럼 버려졌던 것임에도 불구하고 고가에 거래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식량난이 극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이지요.
거기에 또 비둘기 오물까지도 다섯 세겔로 거래되었다고 하니 그 참상이 짐작되고도 남음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던 와중에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놀라운 예언을 합니다.
열왕기하 7장 1절
“엘리사가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일 이맘때에 사마리아 성문에서 고운 밀가루 한 스아를 한 세겔로
매매하고 보리 두 스아를 한 세겔로 매매하리라 하셨느니라”
지금 쓰레기나 다름 없는 나귀 머리가 종 몸값의 두 배 이상이나 하고, 비둘기 오물이 다섯 세겔이나 하는 마당에, 한 달이나
1년도 아닌 바로 내일 이맘때 쯤에 밀가루, 그것도 고급 밀가루나 보리가 한 세겔에 매매될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여러분께서 이 자리에 계셨더라면 믿어 지셨겠습니까.
다음 구절을 봅니다.
열왕기하 7장 2절
“그 때에 왕이 그의 손에 의지하는 자 곧 한 장관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 하더라 엘리사가 이르되 네가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 하니라”
여기에 보시면 “왕이 그의 손에 의지하는 한 장관”이라는 사람이 등장하는데 이는 단순히 부축만 해주는 사람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왕의 최측근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지요.
그런데 그가 말합니다. 하나님이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그런 일이 있겠는가 하는 것이지요.
그런 고위직에 올라갈 정도의 인물이니까 지식도 많은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여기서 결정적인 실수를 저지르고 맙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아무리 그가 배운 것이 많다고 하더라도 그는 첫째로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했고, 둘째로는 하나님의 사람의 예언을
멸시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엘리사는 말합니다. 네가 그 놀라운 사실을 눈으로 보겠으나 먹지는 못할 것이라고 하지요.
그러자 다음날 어떻게 됩니까.
열왕기하 7장 5절~7절
“5.아람 진으로 가려 하여 해 질 무렵에 일어나 아람 진영 끝에 이르러서 본즉 그 곳에 한 사람도 없으니
6.이는 주께서 아람 군대로 병거 소리와 말 소리와 큰 군대의 소리를 듣게 하셨으므로 아람 사람이 서로 말하기를 이스라엘 왕이
우리를 치려 하여 헷 사람의 왕들과 애굽 왕들에게 값을 주고 그들을 우리에게 오게 하였다 하고
7.해질 무렵에 일어나서 도망하되 그 장막과 말과 나귀를 버리고 진영을 그대로 두고 목숨을 위하여 도망하였음이라”
그 전날 밤 하나님께서는 사마리아성을 포위하고 있던 아람 군대에게 큰 군대소리를 듣게 하시는 바람에, 그들은 원군이 오는 줄 알고
모든 것들 다 버려 놓고는 줄행랑을 쳤다는 것 아닙니까.
이렇게 되자 이스라엘 사람들은 밖으로 나갈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버려 놓고 간 풍부한 식량이나 물자를 고스란히 얻을
수 있게 된 것이지요.
이제 식량이 넉넉해 집니다. 그러니 물가가 당연히 떨어지겠지요.
열왕기하 7장 16절~17절
“16.백성들이 나가서 아람 사람의 진영을 노략한지라 이에 고운 밀가루 한 스아에 한 세겔이 되고 보리 두 스아가 한 세겔이 되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되었고
17.왕이 그의 손에 의지하였던 그의 장관을 세워 성문을 지키게 하였더니 백성이 성문에서 그를 밟으매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죽었으니 곧 왕이 내려왔을 때에 그가 말한 대로라”
이 성경말씀의 순서가 기막히지 않습니까. 만약에 16절과 17절이 바뀌어 있었다고 한다면 선지자 엘리사의 예언이 조금 빗나간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경히 여기고 하나님의 사람의 예언을 멸시한 장관이 먼저 죽고 난 다음 물가가 떨어졌다고 한다면 장관이 그 사실을
모르고 죽었을 수도 있잖아요.
하지만 이 기록의 순서는 놀랍습니다. 엘리사의 예언대로 물가가 떨어졌어요. 그러니 그 장관도 그 사실을 알았겠지요.
이제 아람군대가 버리고 간 식량들을 얻으려고 굶주린 백성들이, 봇물처럼 한번에 몰려나오자, 왕의 측근은 그 식량을 입에 한 번
대보지도 못하고 사람들에게 밟혀 죽고 말았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그는 왜 이렇게 죽고 말았을까요.
그것은 바로 오메가의 하나님을 믿지 못했기 때문인 것이지요.
마지막을 아시고 우리를 구원해주실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만 것입니다.
이에 앞서 열왕기하 6장에 보시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아람 왕이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를 잡아오라고 하면서 말과 병거와 수많은 군사를 보냅니다.
열왕기하 6장 15절~17절
“15.하나님의 사람의 사환이 일찍이 일어나서 나가보니 군사와 말과 병거가 성읍을 에워쌌는지라 그의 사환이 엘리사에게 말하되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하니
16.대답하되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 하고
17.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시매 그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엘리사의 사환이 아침에 일찍 일어나보니 난리가 났어요. 수많은 군사가 자신들을 포위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엘리사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우리와 함께 한 무리가 저 군사보다 많다는 거예요. 그리고 영의 눈을 열게 합니다.
그러자 무엇이 보입니까.
그렇습니다. 영의 눈이 열리자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라사 주위를 둘러 지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는 것입니다.
이 오메가의 하나님, 마지막에는 우리를 구원해주실 하나님을 알게 되면 아무리 현 상황이 어렵다 하더라도 우리가 어찌 두려워하거나
좌절하거나 낙심하거나 절망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제가 이렇게는 말하고 있습니다만, 저도 또한 두려워하고 좌절하고 낙심하고 절망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가끔 그런 사람 있어요.
정말 소망도 뭐도 안 보일 때 죽고 싶다는 사람에게 하는 말 있잖아요? 그런 사람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이봐, 이 세상에 죽을 각오로 하면 못할 게 뭐가 있냐.”
가끔 그런 말이 무슨 대단한 위로가 되는 것으로 착각하시는 분들이 계신 것 같은데, 제 경험상으로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상처 난 곳에 소금을 뿌리는 일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제가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던 시점에서 크게 절망을 한적이 있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제가 대학을 떨어졌을 때의 일이거든요.
사실 이런 말씀을 들으면 그게 뭐 대수냐고 하실 지 모르겠습니다만, 수험생 입장에서는 그게 그리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닙니다.
더구나 당시 저는 일본에 살고 있었는데 한국에 있는 대학을 치기 위해서는 비행기를 타고 와야 하잖아요. 그 뿐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는데, 아무튼 제 인생에서 처음 시험을 본 대학 입시에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때의 제 심정이 어땠겠습니까.
글쎄요. 낙심? 좌절? 절망? 아니, 그것보다 오히려 수치가 더 컸습니다.
당시 일본에 있는 저희 아버지 직장에서는 올해 누구 집 애가 어디를 본다는 건 소문이 다 나거든요.
그건 제 추측이 아니라 사실 그래요.
왜냐하면 그 전 해까지도 제가 일본에 있을 때 누가 어디 되고 누가 어디 됐다는 말을 계속 들어왔었거든요. 그러면 거기서 저만
예외가 되겠습니까.
합격자 발표가 있는 날 그 대학에 갔다가 제 이름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다음에 길을 걸어서 정문으로 내려옵니다.
거기는 좀 정문까지 길이 일직선으로 뻗어 있거든요. 학교가 참 멋이 있어요.
거기를 이렇게 터벅터벅 걷고 있는데 왼쪽에 보니까 큰 건물이 있더라고요.
그 건물이 학생회관이라는 사실은 한참 뒤에 알게 됐는데, 아무튼 이 또한 멋있고 큰 건물이에요.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당시 저는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저 건물 꼭대기에서 뛰어내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실 저는 평소에 고소공포증이 있어서 높은 데는 정말 무서워합니다. 하지만 그 때는 그런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아요.
그리고 뭐, 죽을 각오로 하면 못할 게 없다?
아까도 말씀 드렸습니다만, 그런 말은 요만큼도 위로가 안 됩니다.
이제 다시 일본으로 돌아간 후에 당하게 될 지도 모르는 그 온갖 수치를 생각하면 정말 견딜 수가 없더라고요.
그런 것들을 생각하니 그냥 팍 뛰어내릴 수만 있다면 얼마나 편할까 하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그건 어디까지나 생각이었을 뿐, 그럴 용기도 없고, 그리고 무엇보다 그 건물 옥상까지 올라가는 방법도 몰랐던, 저는 그냥
집으로 향했지요.
그러고나서 다음 해에, 결과적으로 본다면 1년 늦었지만, 그래도 처음에 거기보다 조금 더 좋은 학교에 들어갈 수가 있었어요.
얼마나 다행이고 감사한지 모르지요.
만약에 그 사실, 1년 뒤에 그렇게 될지를 알았더라면, 당시에 제가 그토록 힘들어하고 괴로워하지는 않았을 것 아니겠습니까.
1년 늦게 제가 대학에 합격했다는 발표가 있고 얼마 뒤에 저희 아버지가 출근을 하시니까, 직장에서 그 때까지는 전혀 모르던 상당히
높은 분들이 와서는 “축하합니다. 저도 거기 나왔습니다”라는 인사를 하시더라는 거예요. 어떤 분은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인사를
하시더래요.
그래서 참 목에 힘도 들어가고 기쁘셨다고 하는데, 이를 뒤집어보면 무엇입니까.
작년에는 그럼 역시 제가 떨어졌었다는 사실을 다 알고 있었다는 거잖아요. 그래서 저는 그 말을 듣고 다시 한 번 좀 창피했던
기억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많은 것을 아는 것 같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 과장이 아니라 정말 한치 앞도 몰라요.
그렇게 많은 지식이 있던 왕의 측근도 바로 다음날 일어날 일을 알지 못하고 믿지도 못해서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말지
않았습니까.
전도서 7장 14절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장래 일을 알지 못하게 하셨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알지 못하게 하셨다고 하는데 우리가 혼자 다 아는 척 하면서, 이제 모든 것이 끝이다 뭐다 하면서 난리를 치게 된다면
그것은 교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오늘은 제가 좀 작심하고 말씀을 드려야 하겠습니다.
특히나 한국 교회에서는 ‘구원의 확신’이 있냐 하는 것이 무슨 믿음이 좋은 지 안 좋은지에 대한 척도처럼 여겨지는 경향이 있는 것
같은데, 저는 여러분께 분명히 말씀 드립니다.
여러분 안에 구원의 확신이 있으십니까. 여러분은 지금 삶이 끝난다 하더라도 천국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하는 확신이 있으십니까.
저는 여러분께 말씀 드립니다. 그런 근거 없는 확신은 지금 당장 버리십시오.
그것이 좋은 믿음은커녕 오히려 사람을 교만하게 만드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얼마 전에 인터넷에서 보니까 어떤 분이 글을 올리셨는데, 그 교회 권사님으로부터 큰 상처를 받았다고 합니다.
이분 말씀에 의하면 주일 오후 예배를 마치고 모 권사님께서 내려오셔서 대뜸 화를 내시면서 본인 말만 와다다다다 하시고 돌아서서
교회를 나가시는데 한편으로는 정말 당황스럽고 한편으로는 화가 머리 끝까지 차 올랐다고 해요.
그러면서 드는 생각이, 아니, 많고 많은 집사님, 권사님, 전도사님, 담임목사님에게 말을 안하고 왜 교회 청년인 나에게 저런
말투로 말을 했어야 했나 했다는 거예요.
권사님이라고 하시니 얼마나 구원의 확신이 넘치는 분이셨겠습니까. 하지만 그런 구원의 확신이 있으면서 그렇게 남들에게 그것도 교회
안에서 상처를 주었다면 그깟 확신이 있어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여러분, 우리 가운데에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까.
한번 구원 받았으니, 이제 나는 무슨 짓을 해도 구원을 받아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하는 그와 같은 국적불명 출처불명의 묻지마 식
구원의 확신이 있다면, 그런 것은 당장 버리시기 바랍니다.
고린도전서 9장 26절~27절
“26.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27.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바울도 자신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죽을 힘을 다해서 사역을 감당한다고 고백하는데, 우리가 뭐라고 혼자서 구원의
확신이 있다면서 교만하게 굴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가져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구원의 확신’이 아니라 ‘구원의 약속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에 보시면 놀라운 믿음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욥처럼 어려움을 당한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그는 고난 가운데에도 끝까지 믿음을 버리지 않습니다.
욥기 23장에 보시면 그는 고난 가운데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욥기 23장 8절~10절
“8.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9.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10.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그렇습니다.
눈에는 보이지 않고 귀에는 들리지 않고 손에는 잡히지 않더라도, 우리가 가는 길을 오메가이신 하나님께서 아시기 때문에, 끝까지
주님을 믿고 의지하기만 하면 마침내 순금 같이 승리하게 된다는 이 욥의 믿음이 우리의 믿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믿음을 갖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다니엘 3장에 보시면 느부갓네살 왕이 다니엘의 친구들에게 엄히 말하기를, 당장 자기가 세운 우상에게 절을 하면 살려줄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불타는 풀무 속으로 던져 넣겠다고 엄포를 합니다.
그 때 다니엘의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어떻게 고백합니까. 우상에게 절을 할 테니 제발 살려 달라고 애원을 합니까.
아닙니다.
다니엘 3장 16절~18절
“16.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17.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18.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그들은 말합니다. 왕이 우리를 불구덩이 속으로 던져 넣는다 해도 우리를 구원해주실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에 우리를 구원해주지 않으신다 하더라도, 우리는 우상에게 절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지 않습니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왜 이토록 담대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구원의 약속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가장 사랑하시는 독생자 예수님을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게 하실 정도로, 그리고 그 대가로 우리의 죄를
해결해 주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토록 사랑해주시고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다 주셨는데, 지금 우리가 당장 힘들다고, 우리 생각으로는 도저히
방법이 없을 것 같다고 해서 낙심하거나 좌절하거나 절망을 한다면, 이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다름아닌 교만인 것이지요.
“너희는 장래 일을 몰라. 하지만 나는 알아. 내가 너를 버리지 않을 거야. 너를 구원해 줄 거야.” 라고 말씀하고 계시는데도
불구하고, 아니에요. 나는 알 수 있어요. 나는 망했어요. 나는 이제 끝이에요. 라고 주장을 한다면 하나님 앞에서 이보다 더
교만이 어디 있겠습니까.
여러분,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위해 독생자 예수님의 생명을 주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해도 마침내 끝내는 우리를 구원해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한번 따라해 주시기 바랍니다.
“어차피, 우리는, 잘 됩니다.”
다시 한 번 따라해 보실까요?
“어차피, 우리는, 잘 됩니다.”
아멘!
이제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이 우리 눈앞을 가로막고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약속에 대한 확신’을 끝까지
지키심으로 말미암아, 오메가이신 하나님께서 우리가 가는 길을 아시고 인도해주셔서, 마침내 주님과 함께 놀라운 승리와 영광을
얻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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