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0회 [요한계시록 제4회] 요한계시록의 비밀과 비결 (4) - 이루리라교회
 

홍성필 목사
이루리라교회
www.이루리라.com
mail@IRURIRA.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장 2절~3절
“2.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하였느니라
3.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설교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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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요한계시록 순수강해 4번째 시간으로서 계속해서 “요한계시록의 비밀과 비결”에 대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지난 주는 예언이 어려운 이유에 대해서 살펴 보았지요. 다섯 가지 중 네 가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첫째가 뭐였지요?

예, 첫째는 핵심 키워드의 탈락이었습니다. 이는 성경에 기록된 예언 말씀이 오염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지명이나 인명 같은 구체적인 고유명사를 탈락시켰기 때문에 예언 말씀의 해석에 어려움이 있다는 내용이었지요.

둘째는 수평적 환경문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주님께서 요한에게 장차 일어날 일에 대해서 정확하게 보여주셨다 하더라도 2천년 전의 요한이 그 장면을 묘사한 글을 2천년 후의 우리가 읽게 된다면 그 이해에 있어서 차이가 일어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셋째는 수직적 환경문제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 나라에 대한 기록에 있어서, 하나님 나라에 아직 가보지 못한 우리가 그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게 됩니다.

넷째로 성경의 예언을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이유는 아직 때가 이르기 전이기 때문이라고 말씀 드렸지요.

자, 그렇다면 오늘은 예언이 어려운 마지막 이유에 대해서 알아볼 차례입니다.

오늘은 결론을 말씀 드리기 전에, 우선 우리에게 친숙한 성결말씀부터 살펴볼까 합니다.

교회에 몇 년 다니게 되면 이 내용에 대한 설교 말씀을 들어 보신 적이 분명 있으실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바로 ‘물위를 걸으신 예수님’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에 대한 기록은 마태복음 14장,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도 각각 6장에 나오는 내용이지요.

 
그렇다면 여러분께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이 구절에 대한 설교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께서는 어떠한 가르침을 배우셨습니까.

이 성경구절을 바탕으로 해서 전해지는 설교의 주제는 무엇이었습니까.

물위를 걸으신 예수님에 대한 설교를 본다면 대부분 마태복음 14장 구절을 많이 인용합니다.

바로 앞 구절은 그 유명한 오병이어의 기적에 대한 기록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리들에게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성인 남자만 오천 명을 먹이셨다고 하는데, 이는 당시에는 여성이나 미성년자는 인구 수에 포함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나와 있는 것이고, 남녀노소 다 합치면 대략 2만명은 되었을 것이라고 신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이제 문제의 내용이 등장합니다.

그 부분을 한 번 보실까요?

우선 마태복음 14장 22절~23절입니다.

 
마태복음 14장 22절~23절
“22.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23.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니라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그와 같이 놀라운 기적을 일으시킨 바로 직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재촉해서 배를 태워 보내십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해가 저물었다고 하니 최소한 제자들이 배를 몰기 시작했을 때에는 아직 날이 밝았겠지요.

그리고 예수님은 홀로 산에 기도하러 올라가셨다고 합니다.

그 다음 24절~25절입니다.

마태복음 14장 24절~25절
“24.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더라
25.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이제 제자들끼리 노를 저으면서 배를 타고 가는데 폭풍이 불어와서 배가 흔들립니다.

바람 때문에 아무리 노를 저어도 앞으로 가지 않아요.

그렇다고 이미 육지에서는 멀리 왔기 때문에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당시 열 두 제자 중에서 최소한 베드로, 안드레,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 이 네 명은 어부 출신입니다.

그러니까 어려서부터 배를 모는 데에는 잔뼈가 굵었어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있어서도 손을 쓸 수조차 없는 상황이었던 것 같습니다.
 
25절에 보시면 당시 시간을 ‘밤 사경’이라고 합니다.

보통 유대인들은 밤을 4시간씩 삼경으로 나누는데 여기서 ‘사경’이라고 되어 있는 것에 대해서 주석가들은 이를 3시간씩 사경까지로 나누는 로마식 표기라고 합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1경은 저녁 6시부터 밤 9시까지, 2경은 밤 9시부터 자정까지, 3경은 자정부터 밤 3시까지, 그리고 4경은 밤 3시부터 새벽 6시까지라고 하겠지요.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전기도 없는 시대에 해가 저물기 전에 출발했어요.

그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그것은 바로 목적지까지 해가 저물기 전에 도착할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잖아요.

하지만 성경 기록을 보시면 어떻습니까.

밤 사경, 즉 밤 3시부터 새벽 6시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했어요.

인터넷으로 보니까 이스라엘의 일몰시간은 대략 오후 6시에서 7시 정도라고 해요.

그렇다면 아무리 늦어도 오후 5시 쯤에는 출발했다고 보아야 하지 않겠어요?

그리고 물위로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는 유령이라면서 놀라는 것을 보면 아직 해가 뜨기 전이라고 해야겠지요.

이렇게 본다면 그들이 배에 타고 있던 시간을 아무리 짧게 본다 하더라도 오후 6시부터 새벽 4시, 즉 최소한 10시간 이상 배에 타고 있었을 것이고, 주위가 어두워진 시간을 오후 8시부터라고 해도 8시간 이상을 캄캄한 어둠 속에서 폭풍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을 것이라는 계산이 나옵니다.

이제 기진맥진하고 있었을 때에 그들이 무언가를 발견하지요?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발견해요.

주위는 캄캄하고 여전히 폭풍은 몰아치는데 놀랍게도 예수님께서는 그 속을 뚫고 물위를 저벅저벅 걸어오고 계셨습니다.

마태복음 14장 26절~27절
“26.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27.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처음에 제자들은 그 모습을 보고 놀랐지요. 당연하지 않습니까.

주위는 캄캄하고 폭풍이 몰아치는 바다 위로 누군가가 다가온다면 이는 그들 만이 아니라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도 그 모습을 봤다면 “귀신이다, 유령이다”하면서 소리쳤을 것입니다.

불안해하며 벌벌 떠는 제자들을 향해 예수님은 나니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안심을 시키십니다.

그러자 이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어떻게 합니까.

마태복음 14장 28절~29절
“28.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29.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베드로는 어떻게 말합니다. 거기 물위를 걸어오시는 분이 정말 예수님이시라면 저를 물위로 걸어서 오라고 해주세요. 그러는 것 아니겠습니까. 참 대담하지요.

이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오라”라고 하세요.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베드로가 폭풍이 몰아치는 바다 위로 뛰어내렸더니 그도 역시 물위를 저벅저벅 걸어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어떻게 됩니까.

마태복음 14장 30절~32절
“30.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31.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32.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예, 바람을 보고 무서워하여 빠지게 되지요.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보고 뭐라고 하십니까.

마태복음 14장 31절에 의하면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라고 하시고는 곧바로 베드로의 팔을 잡아 건져내 주십니다.

교회에 몇 년 다녀 보신 분들은 대부분 익숙한 내용이지만 그래도 모르시는 경우도 있지 않을까 해서 조금 자세히 말씀 드렸습니다.

그러면서 뭐예요? 예, 우리는 믿음에 있어서 어떠한 환난이 오더라도 눈앞의 바람을 보고 무서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 너머에 계신 예수님만 바라보고 담대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예, 대부분 그와 같은 말씀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아니, 그러한 말씀이 틀렸다는 것이 아닙니다. 저도 그와 같은 주제로 말씀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분명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간과하고 있는 중요한 점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쩌면 지금까지 몇 번이고 들어본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놓쳐온 부분일 수도 있어요.
 
이와 같은 말씀은 자칫 그 내용의 주인공이 물위를 걷게 해달라고 했던 베드로가 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좀 이상하게 됩니다. 그건 뭐냐 하면 이 부분에 대한 기록이 마태복음 외에도 있다고 말씀 드렸지요?

먼저 마가복음입니다.

 
마가복음 6장 47절~52절
“47.저물매 배는 바다 가운데 있고 예수께서는 홀로 뭍에 계시다가
48.바람이 거스르므로 제자들이 힘겹게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쯤에 바다 위로 걸어서 그들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
49.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 오심을 보고 유령인가 하여 소리 지르니
50.그들이 다 예수를 보고 놀람이라 이에 예수께서 곧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고
51.배에 올라 그들에게 가시니 바람이 그치는지라 제자들이 마음에 심히 놀라니
52.이는 그들이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

다음은 요한복음이에요.

요한복음 6장 16절~21절
“16.저물매 제자들이 바다에 내려가서
17.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는데 이미 어두웠고 예수는 아직 그들에게 오시지 아니하셨더니
18.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더라
19.제자들이 노를 저어 십여 리쯤 가다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20.이르시되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신대
21.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그들이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

이것을 보십시오.

물위를 걸으신 예수님에 대한 설교 말씀을 전할 때에는 꼭 빠지지 않고 등장한 베드로가, 어떻게 된 것이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어요.

베드로의 ‘베’ 자도 없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마태복음과 달리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의 말씀은 알맹이가 빠진 기록일까요?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마태복음 보다도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은 그 핵심내용을 이 짧은 길이에 담아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이 말씀 중에서 핵심은 베드로가 물위를 걷다가 빠지자 예수님께서 구원해 주셨다고 하는, ‘물위를 걸은 베드로’가 아니라, ‘물위를 걸은 예수님’이 바로 이 말씀에 있어서의 주인공이며, 핵심 내용은 “베드로는 어떻게 물위를 걸을 수 있었는가”가 아닌, “예수님은 왜 물위를 걸어 오셨는가”하는 점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께서는 이 점에 대해서 목사님 설교 때 들어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예수님께서는 왜 물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셨을까요.

이는 어렵지 않아요. 그 당시 제자들의 상황이 어땠는지를 알면 되겠지요.

마태복음 14장 24절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더라”

지금 제자들이 예수님 없이 밤중에 배를 타고 가는데 바람 때문에 크나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이미 육지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이에요.

그들에게는 지금 예수님의 도움이 필요했어요. 하지만 그 때 예수님은 육지에 계셨잖아요.

이와 같은 상황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시기 위한 방법은 단 하나, 물위를 걸어서 가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아니, 물위를 걸어서 가시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하겠지요.

그러니까 이 물위를 걸으신 예수님에 대한 말씀이 우리에게 주시는 가르침은, 와,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서 물위도 막 걷고 그러시네, 신기하다, 가 아닙니다.

이 말씀의 마지막은 어떻게 끝이 납니까.

마태복음 14장 32절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제자들에게 나는 물위도 걸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바람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이 문제를 해결해주시기 위해서 물위를 걸어서라도 와 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는 무엇을 말해주고 있습니까.

그것은 단순히 예수님께서는 물위도 걸으실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우리에게 주님의 도움이 필요할 때에는, 우리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방법이라 하더라도 주님께서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틀림없이 구원해 주신다는 말씀, 이것이 이 말씀의 핵심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좀 소박한 질문을 던져볼까 합니다.

예수님은 왜 물위를 걸으셔야 했다고 말씀 드렸지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제자들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의 도움이 절실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과 예수님 사이에는 뭐가 있었어요? 예, 물이 있었습니다. 바다가 있었지요.

좀 오래된 노래 가사는 아니지만, 바다가 육지라면,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어가실 필요도 없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제자들과 예수님 사이에는 육지가 아닌 바다가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시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바다를 통과할 수밖에 없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이 뭐냐 하면 바로 ‘어쩔 수 없이’라는 부분이에요.

빌립보서 2장 5절~8절
“5.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께서는 하늘에서 이 땅 위에 그대로 내려오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구체적으로는 하늘에서 강림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들처럼 여자의 몸에서 태어나셨던 것이지요.

이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의 법칙이 지배하는 세계로 오셨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겠습니다.

이 세상의 법칙, 그것은 말하자면 3차원의 법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사역을 하실 때에는 철저하게 이 법칙 안에서 움직이셨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저기까지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사이를 통과해야 하는, 바로 3차원적인 공간에서 움직이셨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다음은 어떠셨습니까.

요한복음 20장 19절~20절
“19.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요한복음 20장 26절~27절
“26.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27.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여기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문들이 닫혀 있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오셨어요. 말하자면 공간이라고 하는 제약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지시지 않았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무슨 귀신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그러실까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어요.

누가복음 24장 39절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똑같은 살과 뼈를 가지고 계시면서도 공간이라고 하는 한계에서 완전히 벗어나신 모습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이는 말하자면 3차원을 넘어선 모습, 4차원 이상의 모습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이지요.

이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는 지금 이 세상에 살아가고 있는 동안에는 3차원이라고 하는 제약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법칙에 매어 있을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와 같은 제약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진 모습을 보여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있어서는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법칙이 지배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도와주시기 위해서 이제 물위를 걸으실 필요가 없어요.

저 먼 거리를 몇 날 며칠을 걸려 오실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언제 어디에 있다 하더라도 우리에게 도움이 필요하다면 그 순간 우리를 도와 주실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사실을 하나님께서는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예레미야 23장 24절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신을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

이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상식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한 존재가 어떻게 동시에 천지에 충만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차원을 초월하신 하나님께서는 가능하세요. 하나님께서는 어디 한 군데에 계시다고 거기에만 계신 것이 아닙니다. 순간순간마다 이 세상 온 천지에 충만하신 하나님이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니까 뭐예요? 예,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임마누엘 하나님, 우리가 언제 어디에 있든지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말씀은, 무슨 과장이나 문학적인 표현이 아니라 구체적이고도 실제적으로 지금 이 순간도 우리와 함께 하실 수 있고, 또한 함께 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와 같은 차원의 차이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무조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부족한 지식과 어설픈 경험에 억지로 끼어 맞추려고 하니까 계시록을 엉뚱하게 해석하고 마는 것입니다.
 

이제 다음 시간부터 계시록을 하나하나 살펴가게 되겠습니다만, 그 순간마다 우리가 계시록에 담긴 그 의미를 마음에 새겨가면서 진정으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복음을 깨우침으로 말미암아, 주님을 더욱 알아가게 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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