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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요한계시록 순수강해 3번째 시간으로서 계속해서 “요한계시록의 비밀과 비결”에 대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예언이 어려운 이유에 대해서 잠시 알아볼까 합니다.
다른 선지서도 그렇습니다만 유독 요한계시록에는 예언으로 보이는 구절이 많이 등장합니다.
여기서 제가 굳이 ‘예언’이라고 말씀드리지 않고 ‘예언으로 보이는’이라고 말씀드린 것은 그 내용이 과연 예언인지 아닌지도 구분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대부분의 예언, 말하자면 예언으로 보이는 구절은 그 내용이 난해해서 지금도 신학자들 사이에서 해석상에 다툼이 있는
부분도 적지 않지요.
그렇다면 왜 이렇게 난해한 부분이 있는 것일까요.
그 이전에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대전제를 확인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이미 첫시간에 살펴본 내용 중에서 계시록은 묵시문학이 아니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단순하거나 구체적인 내용을 일부러 추상적 또는
현학적으로 난해하게 기록한 것이 아니라는 말씀을 드렸지요?
그 이유를 요한계시록 본문에서 찾았습니다.
요한계시록 1장 2절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하였느니라”
그렇습니다. 요한은 쉬운 내용을 일부러 알아듣기 힘들게 어려운 말로 쓴 것이 아니라 자신이 본 것을 그대로 다 증언하였다고
기록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는 여기에 기록된 예언에 대한 말씀도 마찬가지라고 우리는 이해해야 하는 것이지요.
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예언은 난해하게 느껴지는가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하는데, 이는 그 이유는 다섯 가지로
정리해 볼 수가 있겠습니다.
다섯가지 예언 해석이 어려운 이유 중 첫째는 핵심 키워드의 탈락에 있습니다.
지난 주는 메시야에 대해서 구약에는 분명 많은 예언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선지자나 제사장이나 율법학자라 하더라도 바로 그
주인공이 예수님이셨으며,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서 정확하게 해석했던 사람들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나사렛’이라는 말에 있다는 말씀을 드렸지요.
지난 주에 살펴본 바와 같이 구약에서는 메시야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난다는 것, 그리고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예언이
분명히 기록되어 있었고, 그리고 그 예언대로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인 대부분의 시기를 보내신 나사렛에 대한 언급은 구약에 예언된 바가 없었어요.
우리가 생각하기에 메시야에 대한 예언 중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나사렛에서 나올 것이라’ 라는 말씀이 있었다면 예수님께서
조금 더 일찍 구약에 예언된 그리스도 메시야로 인정 받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가질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런 예언은 없었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그 이유가 뭐라고요?
예, 구약성경에는 나사렛이라고 하는 지역이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아요.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구약시대에는 나사렛이라고
하는 지역 이름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렇다면 하필이면, 정말 하필이면 왜 그런 역사도 전통도 없는, 우리 식으로 말한다면 그런 족보도 없는 지역에서 예수님이
자라셨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빌립이 그의 친구 나다나엘한테 말하기를, 예수님을 가리켜 성경에서 예언된 메시야가 나타나셨는데 그 분이 바로 나사렛
예수님이야.
그러니까 나다나엘이 뭐라 그랬다고 되어 있습니까.
요한복음 1장 46절 전반부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이를 현대인의 성경판에서는 다음과 같이 번역하고 있습니다.
현대인의 성경판 요한복음 1장 46절 초반부
“나다나엘이 빌립에게 '나사렛에서 무슨 훌륭한 인물이 나올 수 있겠느냐?' 하였다. ……”
그는 말합니다. 뭐? 나사렛? 아니, 전통도 없고 예언에도 없는, 말하자면 뿌리도 없는 지역에서 무슨 메시야가 나오겠냐, 그런
소리는 내가 지금까지 들어본 적이 없었다, 말하자면 그러고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나다나엘이 이방인입니까. 아니면 믿음이 없는 사람이었나요.
요한복음 1장 47절에서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가리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계세요.
그러니까 이렇게 예수님께서 칭찬하실 정도의 진정한 이스라엘 사람조차도 메시야가 나사렛에서 나오리라는 사실은 전혀 예상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이유요? 메시야가 나사렛에서 나온다는 예언이 성경에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구약에는 그 부분에 대한 내용이 빠져 있었기 때문인
것이지요.
그러면 이전 시간에도 살펴보았던 이사야 7장 말씀은 어떻습니까.
이사야 7장 14절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 말씀에 대해서도 저는 오랫동안 의문이었어요.
만약에 이사야가 이렇게 예언했었더라면 어땠겠어요.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 마리아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예수라 하리라”
만약 이렇게 되어 있었다면 완벽하지 않습니까.
요셉과 동거를 시작하기 전인 동정녀 마리아가 정말로 아들을 낳았어요. 그리고 그 이름이 예수예요.
그러면 구약에 등장하는 메시야에 대한 선지자의 예언과 완전히 일치하게 되니까 그 누구도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사실을 부인하지 못할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선지자는 ‘마리아’나 ‘예수’라는 구체적인 부분은 가려진 채로 예언을 한 것일까요.
자, 여기서 조금 화제를 돌려볼까요.
예를 들어서 어느 날 이런 뉴스가 텔레비전이나 신문을 통해 전해졌다고 합시다.
어제 오전, 서울 어디어디에서 현금 1억원이 든 가방이 발견됐습니다.
가방은 빨강색 여행용 가방입니다. 경찰은 지금 이 돈의 주인을 찾고 있습니다. 이 가방의 소유자는 어디어디 경찰서로 연락해주시기
바랍니다.
자, 이런 뉴스가 나왔다고 해봐요. 그러면 다음 날부터 어떤 일이 일어날 것 같습니까.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이 그날부터 그 경찰서 전화통에 불이 나지 않겠습니까. 아, 사실 그거 내 돈이다. 아니다. 내 돈이다.
그러면서 여러 사람들이 경찰서를 찾아가서 그 돈이 자기 것이다. 내가 이 돈을 어떻게 어떻게 마련한 것이다. 이 돈을 버느라고
얼마나 힘들었는 줄 아냐. 뭐 이렇게 주장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그 중에는 진짜 주인이 있을 수도 있겠지요. 그렇다면 경찰은 그 중에서 어떻게 진짜 주인을 가려낼 수 있을까요.
가방 색깔? 크기? 그 정도는 뉴스를 통해 이미 보도가 나갔겠지요. 그래도 어느 정도는 정보가 있어야 진짜 주인도 자신의 것인지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진짜 소유주를 분간하기 위해 경찰은 특별한 방법을 사용한다고 합니다.
그게 어떤 방법이냐 하면, 경찰은 결정적인 단서를 끝까지 가지고 있다고 해요.
그러니까 진정한 주인이 아니면 절대로 알 수 없는 한 가지 진실을 끝까지 숨겨놓는다고 합니다.
물론 그 부분은 외부에 공개하지 않아요. 언론에서 보도되지도 않았어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이라면 분명히 알 수 있는
사실 하나를 끝까지 남겨놓는다고 하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서, 돈이 들어 있던 가방은 어느 메이커 가방입니까. 또는 가방 안에 있는 돈은 어떤 상태였습니까.
가방 안에 있는 돈은 봉투에 들어 있었는데, 봉투에는 뭐라고 적혀 있었습니까. 가방 안에는 돈 외에 다른 것도 들어 있었는데
그것은 무엇입니까.
이런 사실도 공개를 하면 더 빨리 본래 주인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런 것까지 모두 알려지면 결국 진정한
주인이 나타났을 때에 특정할 수가 없게 되고 말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이와 같은 비밀은 마지막까지 숨겨놓는다고 해요. 그래야 진짜 주인을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인 것이지요.
성경에 있은 예언도 마찬가지입니다.
“……보라 처녀 마리아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예수라 하리라”
라고 만약에 예언되어 있었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렇잖아도 자신이 무슨 재림 예수다 뭐다 하는 사람들이 지금도 얼마나 많습니까. 하지만 이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니에요. 과거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도행전 5장 36절~37절
“36.이 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선전하매 사람이 약 사백 명이나 따르더니 그가 죽임을 당하매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져
없어졌고
37.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의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따르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졌느니라”
이처럼 예수님이 오시기 이전에도 이단 사이비 종교 지도자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이사야서 예수님께서 오시기 700여년 전에 기록되었다고 신학자들은 보고 있는데, 만약에 이사야가 구체적인 실명까지 지적하면서
예언했다면, 그 동안 자기 엄마 이름이 마리아라고 주장하는 예수라는 사람이 얼마나 많이 등장했겠습니까.
그런데 만약에 너도 나도 자기 이름이 예수다, 자기 엄마가 마리아다, 라는 사람들이 넘쳐나게 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성경에 기록된 예언이 오염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 예언이 누구를 가리킨 것인지 분간할 수가 없게 되고 말아요.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예언 말씀이 오염되지 않도록 보호하기 위해서 핵심 키워드를 의도적으로 누락했다고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언 해석에 있어서 지금도 어려움이 있는 것이지요.
두 번째로 예언 해석이 어려운 이유는 수평적 환경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수평적 환경문제라고 하는 것은 쉽게 말해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문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요한은 자기가 본 것을 모두 기록하였다고 합니다.
참고로 그럼 여기에 등장하는 요한은 누구일까요.
많은 분들은 그가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 하나인 사도 요한이라고 믿고 있습니다만, 사실 이를 뒷받침할 만한 근거가 성경에는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요한’이라고 하는 이름이 들어간 책들, 요한복음, 요한일서, 이서, 삼서 모두 저자가 ‘사도 요한’이라는 기록이
어디에도 없어요.
다만 요한이서와 요한삼서 1장 1절에서는 저자 본인을 ‘장로’라고 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계시록에서는 본인을 ‘요한’이라고
하고 있을 뿐, 사도인지 장로인지도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요한이라고 하는 이름이 영어식으로는 John이 되는데, 지금도 서양에 보시면 ‘존’이라는 이름이 흔하잖아요.
성경에도 보면 ‘요한’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사도 요한 말고도 세례 요한, 베드로의 아버지 요한, 마가의 또다른 이름 요한,
그리고 사도행전 4장 6절에 등장하는 산헤드린 공회의원 중 한 사람으로 추정되는 요한이 있습니다.
이 계시록을 쓴 인물이 이 중 한 사람인지, 아니면 전혀 다른 또 하나의 요한인지는 최소한 성경 내에서는 100% 어떤 요한이라고
단정할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신학자들 사이에 있어서도 이 저자 문제에 있어서는 완전한 일치를 보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등장하는 교회나 배경으로 본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다음 부활 승천하신지 얼마 안
되는 시점, 대략 서기 50년 전후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대략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미래의 모습을 그가 보았을 때 이를 어떻게
이해했는가 하는 문제가 생기는 것이지요.
이 때가 우리나라로 본다면 삼국시대 정도가 되는데 그 당시 사람들이 예컨대 21세기 지금 모습을 보았다면 어떻게 묘사했을까요.
예를 들어서 이런 표현은 어떻습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매일같이 긴 뱀 몸속으로 들어갔다 나왔다 하더라. 그 거대한 뱀들은 수가 많은데 이른 아침부터 밤까지 빠른
속도로 큰 성들 땅밑을 누비더라.”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가 보았을 때 이러한 글을 본다면 이것이 무엇인지 금방 알아차릴 수가 있겠지요. 그러면이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예, 바로 지하철입니다.
하지만 그와 같은 지식이 없는 상황에서 지금의 지하철을 보고 2000년 전 사람이 쓴 이와 같은 글을 접했다면 충분히 다른 식으로
오해할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이를 정리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장차 일어날 일들을 정확하게 보여주셨지만 계시록에는 이를 2000년 전을 살았던 요한이 보고
이해한 내용이 적혀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이해하는 데에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셋째로 수직적인 환경 문제가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 나라와 지상에 있어서의 차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성경에 보시면 계시록 만이 아니라 다른 책에서도 간혹 하늘나라에서의 모습이 기록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과학문명이 발달한 21세기 현대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라고 해도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하늘나라에서의 일들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데에는 분명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넷째로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예언의 경우를 본다면 이 중에는 아직 때가 이르기 전이기 때문일 수가 있습니다. 이는 마치 메시야의
탄생과도 같은 경우라고 할 수 있겠지요.
신학자들 중에는 요한계시록에 대한 기록이 장차 우리에게 일어날 일이 아니라, 이미 일어난 일, 말하자면 이미 종료된 상황을 기록한
책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더 구체적으로는 여기에 기록된 재앙이나 심판을 1세기에 일어난 로마 제국에 의한 박해나 여러 사건들을 계시록의 성취로 보는
견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이미 완료된 기록이라고 한다면 그 내용에 있어서 다툼이 없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이 주장에 대한 분명한
오류는 무엇인가 하면, 계시록 마지막에 기록된 완전하고도 완벽한 구원이 이루어진 적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또 누구는 여기에 등장하는 강국 바벨론을 누구는 지금의 미국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것이 1492년이고 미국이 독립한 것이 1776년입니다.
그런데 서기 50년 경에 쓰여진 기록에 그로부터 1500년 뒤에 나타날 나라를 바벨론으로 묘사했다?
물론 이걸 절대 아니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반대로 절대 그렇다고 100% 단정할 수도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 역시 하나의 주장에 불과한 것이지요.
이처럼 다양한 주장이 있다는 것을 싸잡아서 비판할 수는 없습니다.
저도 이제부터 이어질 계시록 강해를 통해서 주장이나 학설이나 또는 추정되는 내용을 말씀드리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뭐냐 하면, 어떠한 주장이든 간에, 명확한 근거도 없는 상황에서 이것이 마치 하나님이 말씀하신 절대적인
진실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라는 점입니다.
우리가 많은 해석을 할 수는 있겠습니다만, 명확하지도 않은 것을 단순히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듯이 섣불리 단정하게 된다면 그야말로
성경을 왜곡하게 되기 때문에 이는 분명 경계해야 한다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예언에 있어서 아직 우리가 확실하게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아직 그 시기가 이르지 않았다는 것의 반증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지요.
이와 같은 예언의 말씀은 때가 이르게 되면 비로소 모든 사람들이 이해하게 된다고 요한계시록은 분명히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간 관계상 예언이 난해하게 여겨지는 마지막 다섯 번째 이유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만,
우리는 계시록을 비롯한 성경에 기록된 예언에 대한 그 의미의 중요성을 깨닫고,
그리고 무엇보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침 없이 주님의 말씀을 성경적으로 올바로 받아들임으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주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놀라운 축복 넘치는 축복을 모두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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