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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요한계시록 순수강해 2번째 시간으로서 지난 주에 이어서 “요한계시록의 비밀과 비결”에 대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지난 주는 ‘묵시문학’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만, 오늘은 ‘예언’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앞서 지난 시간에는 1장 1절부터 3절까지를 보았는데 오늘은 3절만을 보도록 할게요.
왜 진도를 안 나가고 자꾸 1절~3절에 머무르는지 궁금해하시는 분이 계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사실 많은 책의 핵심은 머리말에
숨겨져 있습니다.
좋은 책의 머리말은 그 머리말만 읽으면 그 책이 왜 쓰여지고 무엇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알 수 있어요.
이 요한계시록도 마찬가지입니다. 1절부터 3절까지는 계시록의 머리말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겠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 부분을 놓치고
그냥 넘어가는 바람에 이 계시록의 이해에 대해서 오류를 범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사실 이 계시록의 해석론에 있어서의 핵심은 여기 1절~3절에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자, 오늘 말씀인 3절을 다시 한 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1장 3절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이 말씀은 요한계시록의 구성을 나타내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자세히 보시면 이 계시록 말씀이 주어지는 세 가지 대상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읽는 자’와 ‘듣는 자’, 그리고 ‘지키는 자’입니다.
이렇게 보면 세 가지입니다만 사실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지요. 그것은 바로 ‘읽는 자와 듣는 자’를 하나로 하고, 그리고 나머지
‘지키는 자’입니다.
계시록에는 수많은 예언이 담겨져 있습니다.
하지만 예언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장차 이러이러한 일이 일어날 것이다 하고 하나님께서 미리 말씀해주신 것이잖아요.
이 말씀을 읽는 사람, 그리고 듣는 사람은 성경을 통해서 그 정보를 알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 예언에 대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나중에 살펴보겠습니다만 계시록 1장 7절에 의하면 주님이 장차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고 예언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 점에 대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반면에 ‘지키는 자’는 무엇입니까. 이는 계시록 내용에는 분명 지켜야 하는 부분에 대한 말씀도 포함되어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 16절~17절
“16.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계시록 만이 아니라 모든 성경에는 교훈적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의 구성은 두 가지 즉, ‘예언적인 말씀’과 ‘교훈적인 말씀’으로 정리할 수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계시록에 적힌 내용이 무슨 칼로 무 베듯이 이것은 예언적인 말씀이고 이것은 교훈적인 말씀 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말씀에 따라서는 분명 예언적인 말씀이긴 하지만 거기에는 교훈적인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 경우도 적지 않아요.
이 점에 대해서는 차후에 하나하나 살펴보면서 함께 공부해 나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자, 오늘은 우선 예언적인 부분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계시록에 기록된 수많은 예언적인 말씀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것일까요.
계시록에 대한 강해를 들어보면 이단 사이비 집단 뿐만 아니라 복음주의 교회에서도 예언에 대해서 설명을 할 때 보면, 언제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다, 언제 어느 나라가 일어나서 어디가 어떻게 되고……뭐 이런 말을 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주로 이스라엘을 이야기 하기도 해요.
이제 말세가 가까워지면 지금 있는 이스라엘이 장차 어느 나라와 전쟁을 하게 되고 그 결과 어떻게 되고 등등……마치 자기가 무슨
구약에 등장하는 선지자라도 되는 것처럼 그와 같이 풀어가는 경우를 종종 보기도 합니다.
자, 그렇다면 그와 같은 예언에 대한 풀이를 우리는 믿어야 하는 것일까요.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실 이렇게 나가다 보면 어떻게 되냐 하면, 맨날 때만 되면 등장하는 시한부 종말론 같은 데로 빠지게 되기도 하는 것이에요.
일반 교회에도 보시면 자신을 무슨 특별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나머지, 무슨 꿈에서 무엇을 봤네 무엇을 들었네 하는 사람들이
계십니다. 그렇다면 그와 같은 주장에 귀를 기울여야 할까요.
결론을 말씀 드리기 전에 우선 구약과 신약에 대해서 잠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은 크게 나누어서 구약과 신약으로 나누어지죠?
여기서 구약과 신약이라는 이름을 보면 어떻습니까.
구약이라고 하는 것은 오래된 약속, 그리고 신약이라고 하는 것은 새로운 약속입니다.
그렇다면 구약은 무슨 약속이고 신약은 무슨 약속입니까.
사실 대단히 단순한 질문임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질문에 대해서 명쾌하게 답을 하실 수 있는 분들이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간단하게 말씀 드리겠습니다.
구약 오래된 약속은 구세주 메시야가 오신다는 약속이고, 신약 새로운 약속은 구세주 메시야가 다시 오신다는 약속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익히 잘 아는 바와 같이 구약에는 메시야의 초림에 대한 예언으로 넘칩니다.
벌써 창세기부터 등장하잖아요.
창세기 3장 14절~15절
“14.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
15.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아담과 하와를 타락시킨 마귀 사탄에게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는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나 그는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하시지 않습니까.
이는 예수님께서 여자의 후손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희생을 당하게 되지만, 그 결과로 마귀 사탄의 권세를 물리치게 될 것이라는
메시야의 역사를 예언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는 그 외에도 많지요.
이사야 7장 14절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처럼 성경에는 메시야의 초림에 대한 예언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입니다. 구약에서 이와 같이 메시야가 오신다는 예언이 많았다면, 이에 대해서 올바로 해석한 사람이 있었을까요.
지금도 수많은 신학자들이나 목회자들이 성경을 연구하고 있습니다만, 그 열정은 지금보다 어쩌면 과거의 선지자나 율법학자나 제사장들이
더 많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장차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인데,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가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인해서
우리의 죄가 모두 사해져, 마침내 우리가 구원 받기에 합당하게 될 것이라고 해석한 선지자들이 있었습니까.
아니요. 그와 같이 명쾌하게 기록된 내용은 구약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예수님은 어떻게 오셨습니까. 성경에 기록된 예언과는 다르게 엉뚱한 모습으로 오셨나요?
아닙니다. 혼인하기 전인 처녀 마리아가 잉태하여 여자의 후손으로 이 땅에 오시지 않았습니까.
만약에 그와 같은 성경의 비밀을 사람들이 알았더라면, 예수님이 오셨을 때 이미 어려서부터 메시야로 추앙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땠습니까.
예,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세상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받아 결국은 처참한 모습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되고 말았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를 주도한 사람들이 누구였습니까. 성경을 전혀 모르는 이방인에 의해 십자가에 달리셨나요?
아닙니다. 성경에 대해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성경에 대해서 박식했던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에 의해 그와 같은 일들이
저질러졌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이지요.
사도행전 8장 26절 이하에 보시면 에디오피아의 한 관리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조금 길지만 읽어 드리겠습니다.
사도행전 8장 26절~34절
“26.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말하여 이르되 일어나서 남쪽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
27.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관리인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28.돌아가는데 수레를 타고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더라
29.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수레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30.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냐
31.대답하되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냐 하고 빌립을 청하여 수레에 올라 같이 앉으라 하니라
32.읽는 성경 구절은 이것이니 일렀으되 그가 도살자에게로 가는 양과 같이 끌려갔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이 조용함과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33.그가 굴욕을 당했을 때 공정한 재판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그의 세대를 말하리요 그의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하였거늘
34.그 내시가 빌립에게 말하되 청컨대 내가 묻노니 선지자가 이 말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냐 자기를 가리킴이냐 타인을 가리킴이냐”
이디오피아는 요즘 표기법으로는 에티오피아라고도 하는데 지금도 동아프리카에 위치한 국가입니다.
흔히들 아프리카라고 하면 토속종교를 생각하기 쉽겠지만 사실 이 에티오피아는 오래전부터 기독교 강국이에요.
여기에 보면 국고를 맡은 관리가 등장하잖아요. 그냥 관리도 아니고 그 나라의 국고를 맡았다고 하니 얼마나 고위관리직이었겠습니까.
지금으로 본다면 국무총리나 최소한 재무장관 정도는 되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이 관리가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갔다가 돌아가는 길에 수레를 타고 가면서 성경을 읽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가 읽고 있었던 성경이
32절과 33절에 나오지요?
사도행전 8장 32절~33절
“32.읽는 성경 구절은 이것이니 일렀으되 그가 도살자에게로 가는 양과 같이 끌려갔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이 조용함과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33.그가 굴욕을 당했을 때 공정한 재판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그의 세대를 말하리요 그의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하였거늘”
이 기록에 의하면 당시 그 관리가 그 때 읽고 있던 부분은 이사야 53장으로 짐작이 됩니다.
이사야 53장 7절~8절
“7.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8.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고위관리였던 그는 학식이 대단히 높은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주변에는 성경에 대해서 해박한 사람들도 많았겠지요.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아무리 성경을 읽어도 그 말씀을 깨달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 말씀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몰랐던 것은 이 외국 고위관리 만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내로라할 만한 종교지도자들 그 누구도 이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언제 그 예언의 진정한 뜻을 깨닫게 됩니까.
그것은 바로 예언이 모두 이루어진 다음에야 비로소 그 예언이 무슨 말씀인지를 알게 되는 것이지, 그 예언이 성취되기 전에는
제아무리 성경을 많이 연구한 바리새인이나 율법학자나 제사장이라 하더라도 누구 하나 깨달을 수가 없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다음에 하신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누가복음 24장에 보시면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는 성경을 깨우치게 해 주십니다.
누가복음 24장 27절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누가복음 24장 44절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만약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모습을 보고 아, 이는 바로 성경에 기록된 예언의 성취구나, 라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들이
많았다면 예수님께서 굳이 이런 말씀을 하실 필요도 없으셨겠지요.
하지만 아무도 몰랐어요. 성경에 분명히 예언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예언대로 한치의 오차 없이 모두
이루셨음에도 불구하고, 당대 지식인 중 누구도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지금은 어떨까요.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해석들을 합니다. 이것은 이럴 것이다, 저것은 저럴 것이다
하면서 때로는 논쟁까지 벌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알지요? 예, 그 사람들이 아무리 유명한 신학자요 목회자라 하더라도 이와 같은 주장은 아무런 쓸모 없는 공론에
불과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성경이 말해주고 있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억지로 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어디 한 번 앞서 잠시 말씀 드렸던 이사야서의 기록으로 예를 들어볼까요?
이사야 7장 14절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 구절에 대해서 구약시대 때의 율법학자들이 어떻게 해석했는지에 대해서는 모르겠습니다만, 만약에 이 말씀을 가지고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구약에 보시면 ‘아들’과 ‘딸’이라고 할 때 ‘딸’이라는 이름으로 자주 등장하는 곳이 있습니다. 혹시 그게 어디인지 아십니까.
예, 바로 예루살렘이지요.
이사야 37장 22절
“여호와께서 그에 대하여 이같이 이르시되 처녀 딸 시온이 너를 멸시하며 조소하였고 딸 예루살렘이 너를 향하여 머리를 흔들었느니라”
예레미야애가 2장 15절
“모든 지나가는 자들이 다 너를 향하여 박수치며 딸 예루살렘을 향하여 비웃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기를 온전한 영광이라, 모든 세상
사람들의 기쁨이라 일컫던 성이 이 성이냐 하며”
미가 4장 8절
“너 양 떼의 망대요 딸 시온의 산이여 이전 권능 곧 딸 예루살렘의 나라가 네게로 돌아오리라”
그러니까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성경은, 이를 곧이곧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 이는 비유나 상징이다. 따라서 이
말씀은 장차 메시야가 예루살렘에서 나올 것이라는 말씀이다.
만약에 이렇게 주장했다면 어떻겠습니까.
미가 5장 2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율법학자들은 이 말씀을 바탕으로 해서 장차 메시야가 베들레헴에서 출생할 것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이사야서 말씀을 메시야가 예루살렘에서 세상에 나올 것이라는 뜻이라고 주장을 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실 그와 같은 해석이, 문자 그대로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다’라고 믿는 것보다 훨씬 더 현실성이 있을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습니까.
일단 성경에 적힌 예언대로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어요.
하지만 요셉과 마리아는 본래 거기에 살던 것이 아니에요.
누가복음 2장 4절에 의하면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아내 마리아와 함께 갈릴리 나사렛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호적을 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어요. 쉽게 말하자면 자신의 본적지에 가서 주민등록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만삭인 마리아를 데리고 자신의 본적지인 베들레헴을 방문했을 때 마침 거기서 예수님이 태어나신 것이지요.
자, 예수님께서는 예언의 말씀대로 마리아라고 하는 처녀로부터 태어나셨고, 그리고 그 장소는 역시 예언대로 베들레헴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뭐가 없어요? 그렇죠. 딸 예루살렘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후에는 예루살렘으로 가서 살았나요? 아닙니다.
마태복음 2장 13절에서 23절에 의하면 요셉은 마리아와 예수님과 함께 애굽으로 갔다가 또다시 자신들이 살았던 고향인 나사렛으로
돌아왔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 시기를 성경 기록을 바탕으로 신학자들이 계산을 해보면 아무리 늦어도 대략 예수님이 3~4살 정도 때였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 이후 이제 공생애를 시작하시는 시기가 누가복음 3장 23절에 의하면 삼십 세쯤이셨다고 하는데, 그렇게 본다면 나사렛에서는 대략
30년 가까이 지내셨다는 것이잖아요.
하지만 어떻게 된 게 구약에는 메시야가 나사렛에서 나온다는 기록이 전혀 없어요.
그렇다면 왜 이토록 중요한 나사렛에 대한 언급이 구약에는 없는 것일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나사렛이라고 하는 동네는 구약 당시에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베들레헴 같은 경우에는 구약 그것도 창세기부터 등장합니다만 나사렛이라고 하는 지명은 구약에 아예 등장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구약시대에는 나사렛이라고 하는 동네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이지요.
그와 같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제아무리 뛰어난 선지자나 율법학자였다 하더라도 아직 존재하지 않고 있는 ‘나사렛’이라고 하는 동네에서
메시야가 나온다고는 예언할래야 할 수가 없지 않았겠습니까.
이렇게 보시면 어떻습니까.
만약 구약 당시 어떤 율법학자나 제사장이 이사야서 7장 14절 말씀을 근거로 해서 메시야가 예루살렘에서 나온다고 주장을 했다고
한다면, 그 해석은 어쩌면 그럴 듯하게 들릴지는 모르지만, 분명 잘못된 주장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따라서 예수님이 태어나시기 700여년 전에 쓰여진 이 예언을 근거로 해도 그 누구 하나 메시야의 탄생,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에
의한 탄생과 십자가, 그리고 부활을 정확히 해석할 수 없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예언이라고 하는 기록은 우리에게 의미가 없는 것인가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수많은 예언들은 단순히 장차 일어날 일에 대한 말씀이라는 점 이상으로 큰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이 예언에 대한 진정한 의미와 교훈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분명한 사실을 알 수 있지요.
그것은 바로 지금 현재 이 계시록을 비롯한 성경말씀에 기록된 예언을 전한다고 하면서, 마치 자신들이 선지자나 예언자라도 된 것처럼
몇 날 몇 일에 주님이 다시 오신다거나 또는 언제 이 세상이 멸망한다거나 하는 말은 전혀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허황된 주장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말씀에 깨어 있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계시록에 기록된 예언의 의미를 공부하면서, 지금 이 순간도 세상에 범람하고 있는 거짓된 선지자나 주장에 현혹되는 것이
아니라, 올바로 주님의 말씀, 주님의 복음을 깨달아감으로 말미암아, 성경에 기록된 축복, 우리를 위해 예비된 축복을 모두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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