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7회 [요한계시록 제1회] 요한계시록의 비밀과 비결 (1) - 이루리라교회
 

홍성필 목사
이루리라교회
www.이루리라.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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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장 1절~3절
“1.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2.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하였느니라
3.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설교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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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이번 주부터 저는 여러분과 함께 요한계시록 강해, 아니, 요한계시록 순수강해를 시작하고자 합니다.

주제 강해가 아니라 성경 강해는 제가 일본에 있을 때, 2020년 9월부터 2023년 12월까지 3년 동안 164회에 걸쳐서 로마서 강해를 했었지요.

참 그 때는 로마서 강해를 해야 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는데 정작 한 발을 내딛을 때까지 시간이 좀 걸린 것 같았습니다.

제가 좀 보기보다 소심하거든요.

그러나 그 로마서 강해를 진행하는 동안 아마도 누구보다 저 자신이 가장 큰 은혜를 받지 않았나 싶습니다.

무사히 마치고 나니 얼마나 감사함이 넘쳤는지 몰라요.

이제 그 동안 복음서 강해 총 44회와, 지난 달까지 21회에 걸쳐 주제강해인 면류관 강해를 마치고, 다음으로 이제 다시 성경 강해를 해야 할 것 같은데, 무슨 책을 선택해야 할지를, 지난 면류관 강해를 진행하면서도 꽤 오랫동안 기도하면서 고민을 했습니다.

 
솔직히 답은 일찍부터 나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요한계시록 강해를 해야 한다는 마음이었어요.

그러나 역시 ‘아멘!’ 하고 곧바로 시작할 용기가 나지 않더라구요.

정말 내가 주님께서 원하시는 방향대로 계시록 강해를 하면서 올바로 말씀을 전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런 기도도 드렸었어요.

계시록을 하기 전에, 계시록이 아닌 다른 책에 대한 강해 하나만 더 하고 하면 안 될까요, 하는 기도를 드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러고 나면 마음이 불편해요. 그리고 오히려 하루라도 빨리 계시록 강해를 시작해야만 할 것 같은 조급함이 몰려 온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니 뭐, 순종하는 마음으로 시작해야지 어쩌겠어요.

그러면서 그런 생각도 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홍해를 건널 때 모든 것을 다 알고 건넌 것은 아니잖아요? 그저 순종하는 마음으로 건넜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스라엘 자손들은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되지요.

저 또한 지금까지 수많은 홍해도 건넜는데 계시록이라는 요단강을 못 건너겠는가 하는 마음이 들었어요. 그래서 이번에도 역시 순종하는 마음으로 시작해 보기로 했습니다.

 
그러니 이제부터 저와 함께 계시록이라고 하는 강을 건너시게 되는 여러분께서도 우리 모두가 다 함께 무사히 건너서 가나안 복지에 들어갈 수 있도록 많은 기도와 관심을 당부 드립니다.

자, 돌이켜보면 성경 중에서 이 요한계시록만큼 수많은 이단 사이비 교주나 집단들에게 농락당하고 유린당하고 그리고 난도질 당한 책도 없지 않을까 합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그 결과로 역시 아무런 잘못 없는 선량한 사람들이 그와 같은 이단 사이비 교주나 집단들에게 속아 넘어가는 바람에, 자신 뿐만이 아니라 가족들까지도 불행하게 되고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되는, 그와 같은 경우가 비단 우리나라 만이 아니라 동서를 막론하고 지금까지 있어왔던 것 또한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제가 일본에서 사역할 당시 한번은 성경공부를 인도한 적이 있습니다.

대략 집사님들 5~6분 정도이셨는데, 첫 시간에 제가 찾아갔을 때 성경 어디를 공부하고 싶으시냐고 질문을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한 집사님이 말씀하시기를, 계시록을 공부하고 싶으시다는 것이에요.

 
저는 솔직히 그 말씀을 듣고 사뭇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제가 생각하기로 계시록이라고 하는 것은 최소한 그 외 성경 전반에 있어서 일정정도 소양이 갖춰진 상태에서 그 이후에 공부를 해도 늦지 않은 책이라고 생각했었거든요.

하지만 여러 사정들을 고려해 보았을 때 그 모임에서 처음부터 계시록을 공부하는 것은 너무나도 이르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우선은 창세기부터 진행을 하자고 말씀을 드렸었지요.

 
지금도 보면 이단 사이비 집단들은 요한계시록을 강조하기 일쑤입니다. 그러면서 자기들 마음대로 난도질을 해대요.

그러면 사람들이 그 해괴망측한 논리에 속아 넘어가서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많은 사람들이 그와 같은 이단 사이비 집단들한테로 몰려가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제가 이번 요한계시록 준비를 하면서 더욱 강하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단 사이비 집단들로 몰리는 이유, 그것은 바로 기존 복음주의 교회가,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요한계시록에 대한 갈증을 채워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것이지요.

기존 교회에서의 계시록 강해는 어떻습니까. 저도 몇 번 들어보았습니다만, 이는 마치 신학이 아닌 세상 학문의 수업을 듣고 있는 것 같아요.

뭐, 제가 나온 법대 수업도 비슷합니다.

맨날 무슨 다수설 소수설 그리고 절충설, 긍정설 부정설 그리고 절충설. 일부긍정설, 일부부정설, 그리고? 예, 절충설.

그리고 A교수는 이를 이렇다고 주장하고 B교수는 이를 저렇다고 주장하고 등등…….

아니, 이게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 학문은 충분히 그럴 수 있지요.

하지만 성경을 해석하는 데에까지 그러면 곤란하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4장 8절~9절
“8.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 노릇 하였더니
9.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

성경 연구와 세상 학문 연구에 있어서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법학이라고 한다면 이는 아무리 훌륭한 법조문이라고 한다 하더라도 결코 영원불변의 진리나 정답이 될 수가 없습니다.

시대가 변하고 환경이 변하면 많은 주장과 논의를 거쳐 얼마든지 개정이 되기도 하고 또한 폐기가 되기도 하는 것이지요. 이는 법률만이 아니라 헌법도 마찬가지잖아요.

그러나 성경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책, 구약 39권 신약 27권 총 66권은 유일하고도 완전한 오류가 없는 하나님 말씀, 모두가 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주신 말씀이라고 믿는 것이 우리 신앙의 시작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해석에 있어서 다소간의 차이가 있을 수는 있겠지요.

 
하지만 성경 해석에 있어서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누군가의 주장이나 어떠한 전승 또는 문헌에 있는 자료를 근거로 해서 마치 그것이 성경 말씀인 것처럼 단정을 한다거나, 하물며 그런 자료들을 근거로 해서 성경이 잘못 되었다거나 한다는 주장은 철저하게 배척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세상 학문을 흉내라도 내듯이, 계시록을 억지로 해석하고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예, 많은 성도들의 갈증, 특별히 요한계시록에 대한 갈증이 해소되지 않는 거예요.

너무나도 막연하고 추상적이고, 그리고 성경에도 안 나오는 것을 마치 성경말씀인 것처럼 갖다 붙이고 그러니까 결국 말씀을 사모하는 사람들이 떨어져 나가는 현상이 반복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와 같은 상황이 더 이상 반복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요한계시록에 담긴 비밀과 그 해석에 있어서의 비결을 올바로 이해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깨닫게 되는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와 같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이 요한계시록 강해 제목을 단순한 강해가 아니라 ‘순수강해’라고 이름을 붙인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누구의 이론, 누구의 주장을 마치 절대적인 성경말씀인 것처럼 단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순수하게 성경말씀에 입각해서 계시록을 바라보자는 의미로 순수강해라고 이름을 붙이게 된 것입니다.

자, 서두가 길었지요? 그렇다면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요한계시록의 비밀과 비결’ 중에서 ‘묵시문학 편’입니다.

요한계시록을 두고 사람들이 묵시문학이라고 하는 말들을 여러분께서는 들어 보신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여러분, 묵시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추상적이나 은유적인 방법으로 표현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문자 그대로가 아닌 상징이나 비유이기 때문에 이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해석 능력을 필요로 한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어떤 일이 일어나냐 하면 여러가지로 다양한 주장이 제기되는 것이지요.

누구는 이 구절에 대해서 이렇게 해석하고 누구는 저렇게 해석한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여기에 있어서 우리는 대단히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아니, 이는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뿐만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에도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중요한 부분들을 놓쳐왔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다름아닌 오늘 본문 말씀에 나와 있습니다.

오늘 말씀, 다시 한 번 보실까요?

 
요한계시록 1장 1절~3절
“1.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2.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하였느니라
3.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여기서 특별히 2절을 보시면 요한은 어떤 것을 증언하였다고 되어 있습니까.

그렇죠. 자기가 본 것을 증언하였다고 기록합니다.

만약에 요한계시록이 묵시라고 한다면, 어떠한 구체적인 것을 보고도 이를 추상적 또는 상징적인 묘사로 기록한 경우라고 하겠습니다만, 이 본문을 보시면 요한은 그것이 아니라 본인이 직접 본 것을 그대로 기록하였다고 하는 것이지요.

그러니 요한계시록은 엄밀히 따지자면 묵시가 아닙니다. 요한이 본 것을 그대로 적은 것인데 어떻게 해서 이것이 묵시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문학이라니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요한에게 무슨 소설 같은 일을 보이셨다는 것인가요. 그런 말씀은 어디에도 없어요.

오히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보이셨다고 말씀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를 정리하자면 요한계시록은, 하나님께서는 요한에게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대로 보이시고, 그리고 요한은 자신이 본 것을 자세하게 기록한 하나님 말씀이라고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누구는 그렇게 말할 지도 모르지요. 성경 특히 구약에 보면 선지서들이 많은데 거기에도 추상적이거나 상징적인 표현이 있지 않느냐.

 
물론 맞습니다. 다니엘이나 에스겔서 같은 선지서를 보시면 그와 같은 기록이 있긴 합니다만, 성경을 자세히 보시면 여기에 대한 해석 또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대부분의 경우 그와 같은 선지서에 등장하는 내용은 여러 학자들의 입을 통해서가 아닌 성경을 통해서 우리는 이해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추가를 하자면, 계시록에 등장하는 내용에 따라서는 지금 우리 상황에서 이해를 할 수가 없는 부분도 적지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라고 하는 점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게 되는데, 이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의문에 대해서 성경에 정답이 기록되지 않은 경우를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만,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은 비단 계시록에 국한된 것은 아니에요.

예를 들어서 창세기에 등장하는 가인과 아벨의 제사는 어떨까요.

 
창세기 4장 3절~5절 중반부
“3.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5.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과 아벨은 아담과 하와의 두 아들인데 그들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는 작은아들 아벨이 드리는 제물은 받으셨지만, 큰아들 가인이 드리는 제물은 받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서 히브리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히브리서 11장 4절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여기에도 보시면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고 되어 있긴 합니다만, 구체적으로 아벨이 드린 제사 중 어느 부분이 가인보다 나았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한 기록이 없어요.

 
제가 예전에 어느 교회에서 보니까 그 목사님이 말씀하시기를, 하나님께서는 고기로 제사를 드리라고 하셨는데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안 받으셨다고 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만, 아니에요. 성경에는 그런 말씀이 없습니다.

말이 나온 김에 창세기도 또 보실까요?

창세기 7장에 보시면 하나님께서 이제 홍수로 땅을 심판하시려고 합니다.

그 때 노아에게 말씀하시기를 각종 짐승들을 방주로 들여보내라고 하시는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창세기 7장 2절~3절
“2.너는 모든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수 둘씩을 네게로 데려오며
3.공중의 새도 암수 일곱씩을 데려와 그 씨를 온 지면에 유전하게 하라”

여기에 보시면 방주에 들여보낼 짐승들의 종류를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으로 나누어서 구분을 하십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또 의문이 들지요? 어떤 짐승이 정결한 짐승이고 어떤 짐승이 부정한 짐승일까.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기에 대해서 신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율법에 보면 정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의 구분이 나오는데 정한 짐승은 하나님께 제사로 드릴 수 있고 또한 사람이 먹을 수 있는 반면, 부정한 짐승은 먹지 말라고 하세요.

이에 대해서는 레위기 11장 이하와 신명기 14장 이하에 보시면 자세하게 구분이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말씀하신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은 레위기와 신명기에 기록한 구분이 맞다고 할 수 있을까요?

이는 성경의 순서를 무시한 주장입니다.

성경에 레위기나 신명기가 먼저 나옵니까, 아니면 창세기가 먼저 나옵니까.

당연히 창세기가 먼저 나오지 않습니까.

창세기에 등장하는 노아 당시에는 아직 율법도 없고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구분에 대해서 말씀하셨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그리고 무슨 먹을 수 있는 짐승과 먹을 수 없는 짐승이요? 성경을 자세히 보시면 홍수가 일어나기 전까지 사람들은 채식만 했습니다. 고기를 먹지 않았어요.

창세기 9장에 홍수가 끝나고 나온 노아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9장 3절
“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채소만 먹었는데 이제부터는 고기도 먹도록 해주겠다고 비로소 여기서 말씀하신 것이지요.

그러니까 방주에 들여보내는 짐승 중에서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에 대한 구분은, 그 시점에서는 그 기준을 알 수는 없다고 해야 하겠습니다.

자, 여기까지 보았을 때, 아벨의 제사나 짐승들의 구분방법에 대한 기록이 없기 때문에 창세기가 묵시문학입니까?

이는 신약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전에도 몇 번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만, 요한복음 8장에 보시면 예수님께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글을 쓰시는 장면이 나오죠?

요한복음 8장 6절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요한복음 8장 8절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몸을 굽혀 땅에 쓰셨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과연 무엇을 쓰셨는지에 대해서는 성경에 나오지 않아요.

여기에 대해서 아무리 유명한 신학자나 목사님이 예수님은 이것을 쓰셨다 저것을 쓰셨다 하고 주장을 해봤자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 사람들의 주장에 불과하지 성경에는 근거가 안 나와 있기 때문에 이 역시 정답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창세기나 요한복음이 묵시문학은 아니지 않습니까.

이처럼 어떠한 의문에 대해서 성경에 명확한 기록이 안 나와 있다고 해서 무작정 묵시다 상징이다 비유다 하는 식으로 치부해버리면 그야말로 성경말씀을 잘못 이해하는 오류를 범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계시록도 마찬가지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쉬운 것을 일부러 해석하기 어렵게 은유나 비유로 가득 찬 묵시나 소설이 아닌, 요한이 본 그대로를 기록한 직접적이고도 구체적인 하나님 말씀이라고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는 비단 계시록 만이 아니라 성경 전체의 해석에 있어서 흔들려서는 안 되는 원칙이기도 합니다.

그 원칙이 무엇인가 하면 성경 말씀은 이를 처음부터 비유나 상징으로 해석하려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사정이 있지 않는 한 문자 그대로 이해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모든 것을 비유다 상징이다 이렇게 주장을 하게 되면 성경의 자의적인 해석이라고 하는 폭주를 막을 수 없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본래의 뜻에서 벗어나, 쉽게 말해서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제 오늘부터 계시록을 함께 살펴보면서 이 말씀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축복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모두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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