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면류관 강해 19번째 시간으로서 “세상의 소금과 지혜로운 뱀과 순결한 비둘기”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자, 오늘도 면류관 강해의 핵심구절인 요한계시록 3장 11절을 함께 읽고 시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 11절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아멘.
자, 오늘 구절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 중 대단히 널리 알려진 내용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인 13절에서는 소금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다음 구절인 14절에서는 빛에 대한 가르침을 주고 계십니다. 이 중에서 오늘은
면류관 강해에 합당하다고 여겨지는 ‘소금에 내한 내용을 중심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 다시 한 번 보실까요?
마태복음 5장 13절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모여든 수많은 무리들을 앞에 두고 하신 내용인데, 여기를 자세히 보시면 우리가 놓칠 수
있는 세 가지 특징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첫번째 특징은 시제입니다.
이 말씀을 유심히 보시면 주님은 우리에게 어떻게 말씀하고 계십니까.
너희는 예전에 소금이었다?
너희는 장차 소금이 될 것이다?
주님은 그렇게 말씀하시나요?
아닙니다. 오늘 이 말씀을 자세히 보시면 이는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바로 지금 소금이다” 라고 현재형으로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지요.
다음으로 이 말씀의 두 번째 특징은 그 범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모여든 사람들에게 주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너희 중에서 누구는 소금이고 누구는 소금이 아니라고 하십니까.
아닙니다. 오늘 이 말씀에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모든 사람들을 가리켜서 “너희는 모두가 소금이다”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지요.
마지막으로 이 말씀의 세 번째 특징은 그 장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어디에 있어서 소금이라고 말씀하십니까.
그렇죠. 그것은 바로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셨다는 점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오늘은 이 세 가지 특징을 바탕으로 해서 이 시간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깨달음의 은혜를 모두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는 순서에 있어서 오늘은 마지막 세 번째 특징부터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이 말씀의 세 번째 특징이라고 말씀드렸던 “세상의 소금”이라는 부분입니다.
우선 여기서 한 번 질문부터 하고 넘어갈까요?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분명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누구는 소금이라고 하는 것을 대단히 귀한 것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우리를 소금에 비유하셨다고 말씀하기도 합니다.
이는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에요. 당시 로마 군인들은 봉급으로 소금을 받고 있었다고 합니다. 소금이 영어로는 ‘솔트’ 라고 하는데
라틴어로는 ‘살’이라고 한다고 그래요.
그런데 당시 월급으로 받는 소금을 ‘살라아리움’이라고 한다고 하네요.
그래서 여기서 온 것이 지금도 회사원을 뜻하는 ‘샐러리맨’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소금이 가치가 있었다는 뜻인데, 그런데 잠시만요.
우리가 그만큼 가치 있고 귀한 존재라고 말씀하고 싶으셨다면 단순히 “너희는 소금이다”라고 말씀하셔도 되었을 것 아니겠어요.
그것이 아니라면, “너희는 천국의 소금이다”라고 말씀하셨다면 조금 더 은혜로울 수 도 있었을 거잖아요.
그런데 오늘 이 말씀을 자세히 보시면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이 세상에는 소금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소금의 특징으로는 외형과 본질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외형, 그러니까 겉모습으로 볼 때 소금은 어떻게 생겼습니까.
요즘 마트 같은 데에 가보면 소금도 여러 종류가 있고 생김새나 색깔도 다양한 것 같습니다만, 아니, 뭐, 그렇게 어렵게 생각하지
마시고, 단순하게 보면 어때요.
흔한 소금이라고 하는 것은 겉모습으로 본다면 대부분 하얀색 가루입니다. 그리고 그 맛은 짜지요.
자, 그러면 이제 여기서부터가 중요합니다. 소금을 어떤 음식에 넣으면 어떻게 됩니까.
예를 들어서 우리가 알기 쉽게 하기 위해서 소금을 설렁탕에 넣었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예, 아무리 비싸고 좋은 재료로 설렁탕을 끓였다고 해도, 소금을 넣기 전에는 그 맛이 어때요. 대부분 너무 싱거워서 밋밋하고
아무런 맛이 안 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속에 소금을 조금 넣게 되면 설령탕의 고소하고 깊은 맛이 금방 살아나게 되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러면 반면에 소금의 외형은 어떻습니까.
설렁탕 안에 소금을 넣게 되면 하얗던 소금은 녹아서 온데간데 없습니다.
하지만 무엇이 살아 있어요?
그렇죠. 짠맛은 그대로 살아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이지요.
이는 바로 세상에서의 우리 모습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이제 하늘로 오르시기 전에 그 자리에 있던 제자들에게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마가복음 16장 15절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사도행전 1장 8절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그렇습니다. 우리의 사명은 단순히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다가 천국 가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가진 우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을 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할 수 있겠습니까. 꼭 아프리카나 오지 같은 데 가서 복음을 전파해야지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인가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이 아니라 우리 이웃 중에서도 아직 복음을 접해보지 못한 이웃이 바로 땅 끝이요, 그 곳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 바로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는 첫발자국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를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우리가 세상의 소금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이웃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마치 소금이 설렁탕 안에 들어가서 그 외형을 바꾸는 것과 같은 노력을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전엔 제가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어떤 선교사님이 계셨는데 이 분이 파송된 곳은 경제적으로 좀 열악한 곳이었다고 해요. 그런데 선교회에서 보내주는 지원금이 뭐,
그리 넉넉한 것은 아니었습니다만, 환율 차이가 많이 나다 보니 그 나라에서 생활하기에는 대단히 풍족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선교사님은 이른바 좀 부유층이 사는 깨끗한 동네에서 가정부도 놓고 그러면서 생활을 하셨다고 해요.
그렇다고 오해하지 마세요. 이 선교사님은 무슨 낭비나 사치를 하신 것이 아니에요.
다만 어디까지나 환율차이가 많이 나다 보니까 그렇게 생활을 해도 그리 큰 무리가 없었다는 것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오랫동안 선교를 해도 교회가 부흥하지 않더래요.
그런데 그 이유가 뭐냐 하면 거기 사는 대다수의 현지인들에게 있어서 그 선교사님은 너무나도 부유층으로 보였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자기에게 다가오지 않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선교사님은 이 사실을 깨닫고는 조금 불편하더라도 그 나라의 대다수 서민들이 사는 곳으로 이사를 해서 사역을 시작하고는
마침내 큰 부흥을 이루었다는 말씀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마치 소금이 녹아 들어가는 것처럼 세상 속으로 들어갈 필요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복음까지 세상에 물들어서는 안 되지요.
소금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소금을 흰 색 국물에 넣든 빨간색 국물에 넣든 간에 그 요리에 맞춰서 소금의 모습은 사라집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짠 맛까지 달라지거나, 아니면 그 맛 자체가 없어진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오늘 말씀처럼 바깥에 버려져서 사람들에게 밟히게 될 뿐이라고 주님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저는 성경에서 오랫동안 풀리지 않았던 말씀이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뱀과 비둘기에 대한 비유였어요.
여러분도 잘 아시잖아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유명한데, 이게 정확하게 무슨 말씀일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요, 뭐,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는 말씀은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뱀 같이 지혜로우라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잘 와 닿지
못했어요.
그래서 예전에 성경주석을 찾아봤을 때도 보니까 뱀이 들짐승 중에서 가장 간교하다고 하는 창세기 3장 1절로 연결되어 있더라고요?
그 외에 다른 주석서도 살펴보았습니다만, 뱀처럼 지혜로우라고 하신 말씀에 대해서는 무슨 고대 어디 속담이나 격언이거나 다른 전승을
예로 들면서 우리는 어떠한 위험이 닥치더라도 뱀처럼 지혜롭게 해쳐 나아가야 한다는 식의 내용이 적혀 있을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와 같은 뜻으로 말씀을 하셨다면 꼭 뱀 같을 필요야 없지 않겠습니까. 차라리 사자나 독수리 같이 지혜로워도 되잖아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왜 하필이면 예수님은 뱀처럼 지혜로우라고 하셨을까 하는 의문은 오랫동안 풀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런데 말이에요. 오늘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문득 그 구절을 깨달을 수 있을 것 같더라고요.
그러면서 드는 생각이 뭐였냐 하면, 제가 좀 공부 부족이라서 그랬습니다만, 그 뱀 같이 지혜로우라는 말씀이 어느 대목에 나와
있었는지 금방 생각이 안 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속으로 생각하기를, 이 말씀을 복음 전파에 대해서 하셨더라면 정말 딱 맞아 떨어질 텐데 하고 성경을 찾아봤어요.
그랬더니 어땠겠습니까.
마태복음 10장 16절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이 말씀은 언제 하신 것이었냐 하면, 바로 예수님께서 열 두 사도들을 전도여행으로 보내실 때 하신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되니까 바로 그 뱀에 관한 비밀이 모두 다다다닥 하고 풀리는 듯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자, 앞서 소금에 대해서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가 세상에서 복음을 전할 때에는 그 맛, 그러니까 복음에 있어서의 그 본질은 절대
변해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겉모습은 그 음식에 맞춰서 녹아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 소금이 하얀 가루 그대로 버티고 있다면 제 역할을 못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만약에 우리가 복음을 전한다고 하면서 예컨대 2천년 전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의 그 방식 그대로 전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아니면 우리가 한국사람이라고 해서 한국 교회식 복음을 외국에까지 곧이곧대로 전한다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는 올바로 복음이 전해지지 않습니다. 이는 마치 그런 것이지요.
우리 앞에 놓인 길이 때로는 넓은 길도 있고 좁은 길도 있습니다.
곧은 길도 있고 굽은 길도 있잖아요. 오르막길도 내리막길도 있습니다. 이처럼 다양한 길이 있는데 내 고집대로 굵은 막대기를 들고
들어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어떤 때는 걸리기도 하고 부딪치기도 하고, 그리고 심한 경우에는 막대기가 부러지거나 아니면 결국 지나가지 못하는 경우도 발생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자기 고집대로 복음을 전파하려고 한다면 이는 복음이 제대로 전파될 수는 없는 노릇이겠지요.
그러나 뱀이라면 어떻습니까. 앞에 놓인 길이 넓은 길이든 좁은 길이든, 곧은 길이든 굽은 길이든 자유자제로 들어갈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처럼 우리가 복음을 전파할 때에는 비둘기와 같은 그 순결함은 반드시 지키되, 방법론에 있어서는 뱀과 같은 지혜를 활용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말씀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와 같은 해석은 성경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21장 17절 이하에 의하면, 드디어 예루살렘에 도착한 바울 일행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거기서 만난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바울이 모세의 율법을 부정하고 할례가 필요 없다고 가르친다고 해서 바울에 대한 소문이 아주 안 좋게 나 있다는 소식 을
듣습니다.
사실 바울은 율법을 부정한 것이 아니거든요.
그것이 아니라, 만약에 우리가 율법에 얽매인 존재라고 한다면 우리가 율법을 지킴으로써 의롭게 되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그렇게 되면 누가 필요 없습니까.
그렇죠. 예수님이 필요 없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자기가 자기 힘으로 율법을 지키기만 하면 구원 받을 수 있는데 굳이 예수님을
믿을 필요가 없잖아요.
하지만 바울은 아무리 우리가 율법을 지키려고 해도 율법으로 우리가 구원 받을 수 없고 오로지 예수님을 통해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율법이라는 매임에서 놓임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을 한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터무니없는 유언비어가 퍼지게 되자 바울이 위험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그 지역에 유대식으로 서원을 한 네 명의 유대인이 있어서, 그들이 율법에 따르는 결례를 하게 되어 있는데,
여기에 드는 비용을 바울이 지불을 하면 율법을 지킨 것이 되니까 그렇게 하라고 권면을 받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바울은 어떻게 합니까. 아니다. 율법은 필요 없으니 나는 거기에 동조할 수 없다. 그렇게 강하게 거부를 하나요?
아닙니다.
사도행전 21장 26절
“바울이 이 사람들을 데리고 이튿날 그들과 함께 결례를 행하고 성전에 들어가서 각 사람을 위하여 제사 드릴 때까지의 결례 기간이
만기된 것을 신고하니라”
바울은 그 권면대로 이 사람들과 함께 그 율법적인 의식을 치르는 데에 함께 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왜 그랬을까요.
여기에 대해서는 고린도전서를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9장 19절~21절
“19.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20.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21.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바울이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에 그들처럼 행한 것은, 복음의 본질을 바꾼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을 얻기
위해서라고 하지 않습니까.
반대로 율법을 모르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비록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기는 하나 율법 없는 자처럼 행하는 것은 역시 율법 없는
사람들을 얻기 위한 것, 즉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이것이야말로 복음을 전하는 데에 있어서 외형은 바꾸되 복음의 본질은 변하지 않도록 하는, 그야말로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라고 하신 말씀에 순종하며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는 역시 소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음식 속에 들어간 소금은 그 겉모습은 사라지더라도 짠 맛은 변함없이 남아 있는 것이지요.
그렇게 되면 그 음식 안에 들어간 아주 작은 양의 소금은 그 음식 전체를 변화시키는 놀라운 역할을 하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않고 만약에 흰 가루 모양 그대로 남아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렇게 되면 무슨 모래라도 집어 넣은 것처럼 어기적 어기적
씹힐 것이요, 소금 자체가 녹아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짠 맛은 전혀 나지 않겠지요.
말하자면 자기는 그대로 있을 지 모르지만, 그 결과 음식 맛은 전혀 변화시키지 못한 것 아니겠습니까.
이런 소금은 어떻게 된다고요? 예, 그렇습니다. 밖에 버려져서 사람들에게 밟힐 뿐이라고 주님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여러분께서는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어? 그래? 그럼 난 소금 안 할래. 아니면, 나는 소금이 아니니까 괜찮아. 그러시겠습니까?
제가 아까 뭐라고 말씀 드렸습니까. 이미 복음을 받은 우리는 소금이 될 것이냐 말 것이냐 하는 선택지가 없습니다.
앞서 오늘 말씀에 있어서의 세 가지 특징이 뭐라고 했는지 기억 하십니까.
첫째로 시제에 있어서 우리는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형 소금입니다.
둘째로 범위에 있어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모든 사람을 가리켜서 소금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마지막으로 셋째로 위치에 있어서 우리는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소금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해도 되고 안 해도 된다고 하는 선택지가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자기가 소금인데 소금으로서의 역할을 해도 되고 안 해도 된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여기에 대해서 분명히 말씀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우리가 소금으로서의 역할을 안 하게 되면 바깥에 버려지게 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깥에 버려지지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이 말씀을 가볍게 받아서는 안 됩니다. 구원을 받기 위해 우리는 마지막 날에 주님을 만나는 그 날까지 온 힘을 다해
소금으로서의 사명을 감당 해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태복음 3장 12절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마지막 날은 반드시 옵니다. 알곡과 쭉정이로 판가름 나는 그 날은 반드시 온다고 주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제 마지막 날까지 우리는 우리 모두가 세상의 소금이라는 사명을 깨달음으로써,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함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복음을 온 세상에 널리 전파하여 마침내 우리를 위해 예비해주신 영광된 놀라운 면류관을 한 사람도 빠짐 없이 모두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