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무엇이든지 이루어지는 믿음”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일단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같이 읽어볼까요?
요한복음 15장 7절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이는 주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이, 특별히 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이루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말씀을 많이 들어서 그냥 그런가보다 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런데 이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어떻게 될까요.
내가 주님 안에 머물고 주님의 말씀이 내 안에 머문다.
여기서 주님의 말씀이 내 안에 머문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는 어렵지 않겠지요.
시편 1편 2절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이는 항상 주님의 가르침을 기쁜 마음으로 우리 마음 속에 간직하며 지키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 무슨 추상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초등학생한테도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을 한다면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막상 이렇게 생각하면 이게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을 실감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먼저 요한1서 2장 24절을 볼까요?
요한1서 2장 24절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과 아버지 안에 거하리라”
여기서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고 하는데,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것, 이는 분명 복음 즉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킨다고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너희가 아들과 아버지 그러니까 너희도 하나님 안에 거하게 된다고 하잖아요.
이는 오늘 본문인 요한복음 15장 7절 말씀과 유사합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3장 20절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이 말씀은 우리가 주님을 영접하면 주님은 우리에게로 들어와 거하게 되고 우리는 주님과 함께 거하게 된다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습니까?
이처럼 성경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표현, 즉 내가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이 내 안에 거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이는 신앙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내용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 이처럼 반복적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고, 무엇보다 이렇게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게 된다면 무엇이든지 주님께서 이루시겠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 점을 명확하게 이해하는 것은 우리 신앙에 있어서, 특별히 기도 응답에 있어서 핵심 내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에 대해서 확실하게 이해하고 주님 안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우선 오늘 본문에서 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일단 이 점부터 확인하고 다음으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조금 이상하게 들릴 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주님의 말씀은 단순히 말씀 그 자체가 아닙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을 기억하시나요?
요한복음 1장 1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단순히 우리가 하는 말처럼 입에서 나오는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은 곧 주님 그
자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신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한다는 것은 바로 주님께서 우리 안에 거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다음으로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이 우리 안에 거한다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요.
여기에 있어서 중요한 열쇠는 바로 ‘부부’라고 하는 관계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창세기 2장에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잠들게 하시고 그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셔서 아담에게 이끌어 오시고는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창세기 2장 24절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여기서 부모를 떠난다는 것과 부부가 한 몸을 이룬다는 것을 두고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둘 중에서 핵심은 부모를 떠난다는 점이 아니라 부부가 한 몸을 이룬다는 점에 있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니까 부부의 핵심은 부모를 떠난다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부부가 한 몸을 이루기 위해서 부모를 떠난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부부가 한 몸을 이룬다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이에 대해서는 예전에 말씀 드린 적이 있었습니다만, 부부가 한 몸을 이룬다는 것은 서로에게 있어서 이해관계가 일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즉, 남편에게 있어서 기쁨이 아내에게 있어서도 기쁨이 되고, 또한 아내에게 있어서 기쁨이 남편에게 있어서도 기쁨이 되는 것, 뿐만
아니라 남편에게 있어서 슬픔이 아내에게 있어서도 슬픔이 되고, 또한 아내에게 있어서 슬픔이 남편에게 있어서도 슬픔이 될 때 비로소
이 부부는 한 몸을 이룬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만약에 남편에 있어서 기쁨이 아내에게 있어서 슬픔이 된다거나, 아내에게 기쁨이이 되는 일이 남편에게 슬픔이 되는
경우라 한다면 이는 아무리 부부라 하더라도 한 몸을 이루고 있다고는 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언제 어느 때나 남편 안에 아내가 있고 아내 안에 남편이 있다면 서로 간에 있어서 이해관계가 달라지는 일은 없습니다.
범사에 남편은 아내에 대해서 생각하고 배려하고 아내 또한 무슨 일을 하든지 남편에 대해서 생각하고 배려하게 된다면 이는 그야말로
한 몸을 이루는 부부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부부가 이와 같이 한 몸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부모 곁을 떠나야 하는가.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부부는 결코 한 몸을 이룰 수가 없는가 하는 의문이 생기게 되지요.
자,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하셨던 말씀을 다시 한번 보실까요?
창세기 2장 24절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그런데 이 말씀, 자세히 생각해보시면 좀 적지 않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아니, 지금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셨잖아요. 그러니까 아담과 하와에게 있어서는 육신의 부모는 없는 셈이지요.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부모를 떠나’라고 말씀하셨다잖아요.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설마 그들을 지으신 하나님을 떠나라는 뜻으로 하셨을 리는 없지 않겠습니까.
이는 그러니까 단순히 아담과 하와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라 그 이후에 태어날 우리를 포함한 모든 인류에게 하신 말씀, 그리고
비유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비유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역시 성경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하나님 말씀에서 부모를 떠난다는 것은 두 가지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선 첫째로 부모를 떠난다는 것은 구습에서 벗어나는 일입니다.
신약에 보시면 주님을 신랑으로 그리고 우리를 신부라고 하고 있으며, 우리가 주님을 만나는 날을 반복해서 혼인잔치로 비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신랑이 주님이시고 신부가 우리라고 한다면 주님과 우리가 한 몸을 이루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는 곧 주님의 기쁨이 내 기쁨이 되고 주님의 슬픔이 내 슬픔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하는 것이 필요한 것인가 하면 다음 구절을 보시겠습니다.
에베소서 4장 22절~24절
“22.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이 말씀을 같이 보게 된다면 우리가 새 사람을 입기 위해서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려야
한다고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새 사람을 입기 위해 필요한 것, 다시 말해서 주님과 한 몸을 이루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 즉, 부모를 떠난다는 것이 바로 구습을 벗어 버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직 부모를 떠나지 못한다는 것은 아직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벗어버리지 못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세상적인 유혹과 욕심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여전히 세상적인 재물과 세상적인 명예와 세상적인 권력만 바라보고 살아가는 그 딱한 인생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하루 빨리 이와 같은 너덜너덜한 구습이라는 누더기를 벗어버리고, 주님과 한 몸이 되어 주님의 기쁨이 내 기쁨이
되는 새 사람을 입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부모를 떠난다는 것은 부모로부터 독립하는 일을 말합니다.
부모를 떠나지 못한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다시 말해서 부모 없이 아무 것도 못하는 사람을 뜻한다고 하면 이해가 쉬울 지도
모르겠습니다.
히브리서 5장 12절~14절
“12.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13.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14.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히브리서 기자는 말합니다.
이제 너희도 믿음을 가진지 오래 되었고, 그만하면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정도로 성장해 있어야 마땅한데, 여전히 초보적인 것에
대해서도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을 먹지 못하고 젖이나 먹어야 할 처지 아니냐.
어른이 되어야 단단한 음식을 먹을 수 있을 텐데, 너희들은 아직도 어린 아이인 상태이니 이를 어쩌면 좋냐……
말하자면 그런 내용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젖먹이 같은 믿음이 어떤 것일까요.
요즘도 그런 아이들이 있겠죠?
마트나 백화점 같은 데에서 이걸 사달라 저걸 사달라 하면서 울고 불고, 또 그것 만이 아니라 심한 경우에는 바닥에 누워서 발버둥을
치는 아이들이 있잖아요?
자, 우리가 주님께 기도를 드릴 때, 물론 가만히 얌전하게 기도를 드리는 경우도 있겠지요. 하지만 내가 너무나도 다급해요.
그런데도 여전히 점잖게 기도만 드립니까.
평소에는 일주일에 한 번 나갈까 말까 하는 교회도 이제는 수요예배 철야예배, 그것도 모자라서 전에는 생각지도 않았던 새벽예배까지
나가요. 거기에 금식까지 하기 시작했어요.
사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때를 쓰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아니, 오해하지 마세요. 이것이 결코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지금 간절한데 물불 가릴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부터입니다. 그렇게 평소에는 안 하던 기도나 금식이나 또는 감사헌금까지 드린 결과 기도 응답을 받으면
다행인데, 그런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 결국 응답을 받지 못했어요.
예를 들어서 무슨 시험에 합격하게 해달라고, 아니면 대학이나 회사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그렇게 열심히 기도를 했는데 결과를 보니까
낙방하고 말았어요.
아니면 돈을 많이 벌게 해달라고 기도를 했는데 여전히 가난해요. 병을 낫게 해달라고 몇 번이나 기도를 했는데도 전혀 나을 기미가
안 보여요.
결혼 좀 하게 해달라고 아무리 기도를 해도 그 많다고 하는 선남선녀들은 온데간데 없어요.
그러면 이 시점에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지요.
아이고, 하나님이 계시다면 이럴 수는 없을 거야……하면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세상을 원망하겠습니까.
하나님은 나를 버리셨구나. 이제 나도 하나님과 인연을 끊어 버릴 테다 하고 난리를 치시겠습니까.
남들은 다들 잘 먹고 잘 사는데 도대체 왜 나만 이러는 거야.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러는 거야. 왜 나만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 거야. 도대체 왜!
예, 이와 같은 경우요?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장성한 사람의 믿음일까요?
아이가 엄마 아빠한테 저걸 사달라고 울고 불고, 그것도 모자라서 바닥에 나뒹굴며 난리를 쳐요. 하지만 엄마 아빠가 끝까지 안
사줬다고 해보세요.
그럼 그런 경우에 아이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아니, 이 정도의 내 부탁도 안 들어준단 말이야? 좋았어.
그럼 이제부터 당신들은 내 엄마도 아니고 내 아빠도 아니야!
이게 정상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 이건 장성한 사람의 믿음이 아니에요. 그야말로 젖 먹는 아이의 믿음 밖에는 안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런 믿음은 아무리 가지고 있어 봤자 절대로 성장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난다 하더라도 이런 것은 우리가 주님 안에 머물지 못하고 주님이 우리 안에 머물지 못하는 믿음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 그야말로 허망한 믿음에 불과한 것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믿는 이 성경은 무엇에 대한 책이라고 말씀드렸습니까.
그렇죠. 바로 순종에 대한 책입니다.
창세 이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순종을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말로 해도 못 알아들으니까 어떻게 하셨어요?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오셔서 순종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가 누구한테 순종을 한다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 사람이 나한테 돈을 주었어요. 소원을 들어주었어요. 그러면 나는 기뻐하겠지요? 하지만 그것이 순종인가요?
아니에요. 그건 순종이 아니라 어린 애들도 다 합니다. 아니, 강아지나 고양이 같은 짐승들도 그 정도는 할 줄 알아요.
하지만 진정한 순종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지금 당장은 나에게 있어서 불편하고 불만족스럽고 부당하게 느껴진다 하더라도,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순종 아니겠습니까.
자기 입에 달면 히히거리고 좋아하고 쓰면 뱉어 버리는 믿음은 절대로 순종이 아닙니다.
그것은 장성한 믿음이 아니라 젖먹이의 믿음에 불과한, 그야말로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 믿음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장성한 믿음에 대해서 어떻게 기록하고 있습니까.
시편 119편 71절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히브리서 12장 11절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이 세상에 고난을 좋아하고 징계를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가 장성한 믿음을 가지고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게 된다면, 그 고난과 징계로 말미암아 우리가 주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평강의 열매를 맺게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사람이 나이만 먹는다고 모두가 다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누구는 어른이 되지만 누구는 그저 나이만 먹고 늙은 노인이
되기만 하는 경우도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믿음 안에서 철없는 노인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진정한 가르침을 줄 수 있는 믿음의 장성한 어른, 장성한 용사가 되셔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실 때 어린 아이로 창조하셨습니까, 아니면 어른으로 창조하셨습니까.
그것은 바로 어른으로 창조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저의 상상이 아니라 성경에 나와 있는 기록을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1장 27절~28절
“27.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남녀를 창조하시고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고 정복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일은 젖먹이 아이들이 감당할 수
없습니다. 장성한 어른이라야 능히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믿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젖 먹는 아이가 결혼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의 믿음이 장성하여 진정한 믿음과 진정한 순종을 주님께
드릴 수 있을 때, 주님과 한 몸을 이루어, 주님이 우리 안에 거하고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함으로 말미암아 무엇이든지 이루어지는
것이지, 젖먹이 믿음으로는 무엇 하나 이루어지지 않는 것 아니겠습니까.
부모를 떠나라는 말씀은 단순히 육신의 부모와 같이 살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도 장성하여 부모로부터 독립을 하듯이,
신앙적으로 성장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리고 구습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음을 받으라는 뜻입니다.
오래된 포도주가 아니라 주님께서 부어 주시는 새 포도주로 가득 채우라는 말씀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젖먹이의 믿음에서 벗어나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이 우리 안에 거하는 믿음의 장성한 어른으로 거듭남으로 말미암아, 주님
안에서 무엇이든지 이루어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