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9회 홍성필 목사의 이루리라TV - 성경적인 승천과 재림 - 이루리라교회
 

홍성필 목사
이루리라교회
www.이루리라.com
mail@IRURIRA.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장 8절~11절
“8.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9.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10.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11.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설교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십일조, 감사헌금, 개척후원, 선교후원
온라인 후원
KB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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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면류관 강해 18번째 시간으로서 “성경적인 승천과 재림”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자, 오늘도 면류관 강해의 핵심구절인 요한계시록 3장 11절을 함께 읽고 시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 11절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아멘.


이번에 고난주간과 부활절을 맞이하면서 몇 주 동안에 걸쳐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면 그것으로 끝이냐 하면 그렇지 않지요?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하늘로 올라가시고 그리고 마침내 다시 오시게 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그런데 말이에요. 좀 소박한 부분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여러분께서는 부활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신 예수님이 다시 이 땅에 오신다는 것을 정말로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그 믿음의 근거는 무엇입니까. 왜 믿으세요?

예, 그것은 바로 성경에 그렇게 나와 있기 때문인 것이지요.

우리에게 있어서 성경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신화나 전설이나 역사를 기록해 놓은 두껍기만 한 책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유일하고도 오류가 없는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있어서 성경은 믿음의 시작이요 믿음의 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 신앙에 있어서 성경은 대단히 중요한 기록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을 올바로 세워 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성경 말씀을 올바로 이해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아무리 강조를 해도 지나침이 없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 성경말씀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종종 ‘해석’과 ‘주장’이 혼재되어 있는 경우를 볼 수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성경적으로 보았을 때 ‘해석’과 ‘주장’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간단히 말씀 드리자면 ‘해석’이라고 하는 것은 그 논리에 성경적인 근거가 있는 경우라고 할 수 있고, ‘주장’이라고 하는 것은 그 논리에 성경적인 근거가 없는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두 강도에 대한 설명은 어떨까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좌우 양쪽에는 강도라고도 하고 행악자라고도 하는 둘이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누가복음 23장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지요.

 
누가복음 23장 39절~43절
“39.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40.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41.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42.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43.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에는 이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비난하고 모욕했습니다.

그 때 함께 십자가에 달린 강도 중에서 하나는 예수님을 비방했으나 다른 하나는 예수님을 영접함으로써 구원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너무도 친숙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복음서에 보시면 우리가 놓치기 쉬운 부분도 있습니다. 마태복음 27장 44절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27장 44절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여기에 보면 강도들도 욕했다고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것이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냐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지요.

하지만 우리가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조심해야 하는 점은, 바로 이와 같은 경우에 무조건 어느 한쪽 기록이 잘못 되었다고 단정하는 것은 결코 피해야 합니다.

앞서 확인한 바와 같이 성경은 오류가 없다고 했잖아요.

 
이에 대해서 성경 기록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마가복음 15장 25절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제삼시 그러니까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달리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27장 45절에 의하면 제육시 즉 정오 때에 온 땅이 캄캄해지고는 제구시, 즉 오후 3시 경에 숨을 거두신 것으로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예수님과 두 강도는 아침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무려 6시간 동안이나 십자가 위에 계셨다는 것이 됩니다.

이 과정에서 처음에는 두 강도 모두가 세상 사람들처럼 예수님을 비방했었으나 그 과정에서 한 강도는 회심해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함으로써 구원을 받았다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지요.

이와 같은 성경 이해는 어디까지나 성경 기록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해석’과 ‘주장’ 중에서는 ‘해석’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반면에 ‘주장’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요한복음 8장에 보시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 중에 잡힌 여인을 끌고 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 하는 말이, 율법에는 이런 여자를 돌로 치라고 되어 있는데 당신은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따져 물어요.

주지하시는 바와 같이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어느 정도 자치권은 인정되어 있어서 제한적이기는 합니다만, 이스라엘의 자체적인 규율에 따라 재판이 이루어지고는 있었어요.

그러나 요한복음 18장 31절에 의하면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형벌 그러니까 사형은 반드시 로마에 의해 판결이 내려져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자기들이 마음대로 십자가에 매단 것이 아니라 로마 총독이었던 빌라도에게 끌고 간 것도 그 때문인 것이지요.

분명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에 의하면 간음한 사람은 돌로 치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로마인에 의한 재판을 거치지 않고 당장 그 여인을 죽이라고 한다면 이는 명백한 현행법 위반이 되지만, 그렇다고 죽이지 말라고 하면 율법을 어기는 결과가 되고 맙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간음한 여인을 죽이라고 하면 현행법 위반이 되는 것이요, 죽이지 말라고 하면 율법을 거역한 것이 되고 마는, 말하자면 이는 대단히 교묘하게 짜여진 함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아주 간교한 방법으로 예수님을 올무에 걸리도록 하려고 했던 것이지요.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냐 하면 요한복음 8장 6절 이하에 의하면 손가락으로 땅에 글씨를 쓰셨다고 합니다.

그래도 자꾸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따지고 드니까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하세요?

요한복음 8장 7절에 의하면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라는 말씀을 하시고 다시 몸을 굽혀 땅에 글씨를 쓰셨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과연 무엇을 쓰신 것일까요.

 
누구는 여기에 대해서 그 자리에 모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이름이나 그들이 지은 죄를 썼다고도 하고, 또 십계명이나 주기도문을 썼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뭐냐 하면 이 부분에 대해서는 성경에 어디에도 분명한 근거가 없어요.

그런데도 이것을 썼을 것이다 저것을 썼을 것이다 하는 것은, 이는 해석이 아니라 주장, 말하자면 단순한 추측에 불과한 것이지요.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록이 없다는 것은 우리에게는 그 내용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는 그 글씨 내용보다는 그들 스스로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셨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역시 제 주장에 불과해요. 그러니까 이 점에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 하고 역설을 해봐야 이는 그리 큰 의미는 없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자, 이처럼 성경의 이해에는 해석과 주장의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깊이 있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해석을 잘 해야 합니다.

가끔 무슨 꿈이나 환상에서 이런 말을 들었다 저런 말을 들었다 하는 분들이 계십니다만, 우리의 믿음에 있어서는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성경 본문, 그것도 성경 어느 한 군데만 보는 것이 아니라 신구약 전체를 통해서 그 문맥과 내용을 해석할 수 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지만 해석을 주장처럼 이해한다거나, 또는 성경에 명확한 근거가 없는 주장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마치 성경 기록에 입각한 해석인 것처럼 말을 한다거나 하는 일은 자칫하면 하나님 말씀을 왜곡하거나 변질시킬 우려가 있기 때문에 이는 대단히 경계해야 한다고 하겠습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본론으로 한 번 들어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여러분께 한 번 질문을 드려볼까요? 부활하신 예수님은 하늘로 올라가신 것이 맞습니까.

 
이 점에 대해서 사실은 정말 하늘로 이렇게 올라간 것이 아니라 단순히 비유적인 표현으로 그렇게 기록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씀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사실 이런 내용은 다른 데에서도 종종 봐왔습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하늘로 올라가신 것이 아니다’라는 주장의 근거로 드는 것이 복음서 기록입니다.

 
사도행전 1장 3절에 의하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 나라로 돌아가시게 되었다고 하는데, 우선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서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기록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하겠지요?

그런데 흥미로운 것이 사복음서 중에서 마태복음과 요한복음에 보시면 아무리 찾아봐도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기록이 어디에도 안 보입니다.

 
그리고 마가복음을 보시면 마지막장인 마가복음 16장 9절에서 20절에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데, 여기에는 괄호가 쳐져 있어요.

이는 무슨 뜻이냐 하면, 당시에는 인쇄술이 아직 개발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모든 사본은 다 일일이 사람 손에 의해서 제작이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본에 따라서 어디에는 그 내용이 있고, 또 어디에는 그 내용이 빠져 있는 경우도 있었어요. 그래서 그와 같은 경우에는 이렇게 괄호로 처리를 한 것인데, 그렇다면 사본에 따라서는 마가복음에도 예수님의 승천에 대한 기록이 없는 사본도 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마지막으로 누가복음을 보면 어떨까요.

누가복음 24장 51절
“축복하실 때에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려지시니]”

이렇게 되어 있는데, 여기서도 핵심인 “하늘로 올려지시니”라는 부분이 괄호로 처리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누가복음도 역시 사본에 따라서는 하늘로 올려지셨다는 기록이 없는 것도 있다는 것이 되잖아요.

 
이렇게 본다면 마태복음과 요한복음에는 아예 하늘로 올려지셨다는 기록이 없고,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에도 이 부분은 괄호로 처리되어 있기 때문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늘로 올려지셨다는 것은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한다면,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어? 그러고 보니 그러네? 라는 생각이 드시나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정말 사람들 눈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것일까요? 아니면 이는 단순히 비유적으로 그렇게 설명했을 뿐일까요.

 
자, 그러니까 우리는 성경을 모두 알아야지만 제대로 이해할 수가 있다는 거예요.

오늘 본문 말씀 보세요.

사도행전 1장 9절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이 사도행전은 누가복음을 기록한 누가에 의해 기록되었다고 보는 것이 신학계의 통설입니다. 그런데 이 기록을 보시면 주님은 분명히 올려져 가셨다고 되어 있고 여기에는 괄호도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세히 보시면 여기에는 놀라운 기록이 있다는 사실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구름이 가렸다는 표현입니다.

출애굽기 20장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20장 26절
“너는 층계로 내 제단에 오르지 말라 네 하체가 그 위에서 드러날까 함이니라”

 
당시 옷은 지금처럼 바지가 아니라 위아래를 한 번에 둘둘 감은 듯한 옷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밑에서 보게 된다면 하체가 드러나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위로 올라가시게 되자 이와 동시에 구름이 그 모습을 가린 것으로 보아야 하겠지요.

이처럼 아주 자세하게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어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이처럼 아주 세부적인 점까지 꼼꼼하게 기록되어 있는 것이겠습니까.

이는 분명합니다. 바로, 직접 봤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요.

그리고 10절에서 11절을 보세요.

사도행전 1장 10절~11절
“10.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11.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만약에 제자들 보는 앞에서 그 모습이 스르르 사라지기만 했다고 한다면 어떻겠어요. 그저 단순히 놀라거나 아니면 “어? 어디 가셨지?” 하고 두리번두리번 거리면서 주위를 살피지 않았겠어요?

하지만 이 기록에 보시면 어떻습니까. 예수님은 분명히 하늘로 올려지셨을 뿐만 아니라 이를 지켜보던 제자들은 예수님이 올라가신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고 하잖아요.

그랬더니 천사들이 나타나서 하는 말이 왜 마냥 하늘만 쳐다보고 있느냐고 하면서, 예수님은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신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바로 그 시점에 재림에 대한 분명한 소식도 우리에게 전해 주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바로 이와 같은 점 때문에 예수님의 승천과 재림은 하나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이렇게 몇 번에 걸쳐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기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비유라고 한다? 이는 올바른 성경적 해석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해야 하겠습니다.

 
물론 성경에는 적지 않은 비유가 있는 것도 사실이고 상징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성경을 이해할 때에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원문 그대로 이해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아야 합니다.

만약에 그렇지 않고 이것도 비유다 저것도 비유다 하게 된다면, 마치 성경에 근거가 없는 주장이 근거가 있는 해석처럼 왜곡되어서는 우리가 성경을 잘못 이해하게 될 수가 있다는 점을 항상 경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이에 대한 성경구절을 살펴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 1장 7절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성경에 의하면 예수님은 다시 오실 때 구름을 타고 오신다고 기록되어 있어요.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이는 실제로 구름을 타고 오시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비유라고 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말씀은 그야말로 성경에 근거가 없는 단순한 주장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구름을 타고 오신다는 말씀이 반복적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인 것이지요.

마태복음 24장 30절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마가복음 13장 26절
“그 때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

 
마가복음 14장 62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누가복음 21장 27절
“그 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어떻습니까. 성경에 보시면 예수님께서는 정확히 구체적으로 구름을 타고 오신다는 말씀을 이처럼 반복적으로 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단순히 비유라고 한다는 것은 이 또한 성경에 근거가 없는 주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가 무슨 성경을 모두 설명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의문이 남는 부분은 있어요.

예수님께서는 다시 오실 때의 상황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4장 27절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천둥 번개가 칠 때면 하늘이 번쩐번쩍 하지 않습니까.

여기서 번개라는 것은 쉽게 말하자면 빛이 되겠지요.

빛의 속도는 초속 30만 킬로가 됩니다. 그러니까 1초에 30만 킬로를 간다는 것인데, 지구 둘레가 4만킬로 정도이니까 30만 나누기 4만을 하면 7.5가 되잖아요?

그러니까 빛은 1초에 지구를 일곱바퀴 반이나 돌 수 있는 어마어마한 속도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것은 이처럼 마치 번개가 치듯 오신다는 것인데 이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2천년 전에 예수님께서 오실 때에는 지리적으로 볼 때 대단히 제한적으로 오셨습니다.

저 멀리 이스라엘 땅, 그것도 수도 예루살렘도 아닌 변두리 베들레헴, 그것도 변변한 집이 아닌 마구간에서 태어나셨다고 하는 것이 일반적 견해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님의 탄생은 이처럼 대단히 소박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아는 사람들도 대단히 제한적이었지요.

그러나 장차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는 다릅니다.

이는 말하자면 예수님의 재림사건은 어떤 특정한 작은 지역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구름을 타고 오시는 예수님의 재림사실은 전세계 사람들에게 빛의 속도로 알려지게 될 것이며, 이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차별하고 비방하고 모욕한 사람들에게도 전해지게 된다고 우리는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가능한 일일까요? 구름을 타고 오시는 예수님이 빛의 속도로 전세계에 알려진다? 사실 이 점엔 대해서 지금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 솔직한 생각이겠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를 단순히 비유나 상징이라고 단정하는 일, 하물며 오류라고 주장하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구약 선지서에 적힌 예언을 보실까요. 우리가 잘 하는 내용입니다.

이사야 7장 14절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는 메시야의 탄생을 예언한 구절이지요? 그런데 여러분이 만약에 구약시대에 살고 계셨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렇다면 이 예언을 어떻게 해석하겠습니까.

“세상에, 처녀가 잉태를 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겠어. 이건 어디까지나 비유야. 말하자면 순결하고 때묻지 않은 영광된 도시에서 메시야가 태어나는 것으로 이해를 해야 해.”

이렇게 주장할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마도 당시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한 경우도 많지 않을까 해요.

이는 제 상상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1장 45절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성경에 보시면 예수님이 나사렛에서 자라시게 되는데, 빌립을 통해서 메시야가 나사렛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의 친구 나다나엘이 뭐라고 합니까.

요한복음 1장 46절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이를 생명의 말씀사에서 나온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

현대인의 성경판 요한복음 1장 46절
“나다나엘이 빌립에게 '나사렛에서 무슨 훌륭한 인물이 나올 수 있겠느냐?' 하였다. 그래서 빌립은 '와서 보아라.' 하고 대답하였다.”

빌립이 자기 친구 나다나엘에게 말하기를 성경에서 예언된 분이 나타나셨는데, 그 분이 바로 나사렛에서 오신 예수라는 분이야.

그러자 나다나엘이 그럽니다. 나사렛 예수? 아니, 나사렛 같은 데에서 메시야는 고사하고 어떻게 대단한 인물이 나올 수 있겠냐, 그러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예루살렘이나 베들레헴은 구약에도 등장합니다만, 나사렛은 구약에 없어요. 말하자면 뿌리도 족보도 없는 지역인 셈이지요.

그리고 요셉 집안은 비록 다윗의 자손이긴 했으나 형편이 그리 좋지는 못했습니다.

누가복음 2장 24절에 의하면 예수님이 태어나서 예물을 바치게 되는데 이 때 비둘기를 바쳤다고 되어 있어요. 이로 봐서 집안형편이 그리 넉넉한 편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로 짐작해 본다면 나사렛이라는 지역은 경제적으로 부유층이 살았다기 보다는 서민층이 사는 지역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러니까 이와 같은 말들로 미루어 본다면 당시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메시야는 조금 더 거룩하고 그 신분에 걸맞는 곳에서 태어나실 것으로 믿었는지도 모르는 일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실제로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다’라는 기록이 비유나 상징이었어요? 아닙니다.

그 말씀 그대로 예수님께서는 정말로 마리아라고 하는 동정녀로부터 태어났다는 사실을 지금 우리는 모두가 다 알고 있지 않습니까.

이처럼 우리는 성경을 이해할 때에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일단은 성경기록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시 정리를 하자면 주님께서 부활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것도 말 그대로 사실이고, 장차 주님께서 구름을 타고 오실 것이며, 이는 전세계에서 동시에 일어나는 역사적인 사건이 될 것도 역시 사실이라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 드리면 어떤 분은 그렇게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예수님이 구름을 타고 오시면 어떻고 비행기를 타고 오시면 어때. 그게 뭐가 그리 중요한데 그러냐. 혹시 그런 생각이 드십니까.

 
여러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2천년 전에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누가 앞장서서 예수님을 배척했습니까. 성경을 모르는 사람들이었어요?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들이야말로 성경을 잘 알고 율법을 잘 알고 아브라함과 모세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지킨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도리어 예수님을 배척하고 비난하고 비방했을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 못박아 버리고 말지 않았습니까.

 
그 이유가 뭐예요?

예, 그것은 바로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성경을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높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들의 지위를 높이고 자신들의 부귀와 권력을 유지하는 도구로 밖에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은 백날 성경을 읽어봤자 예수님도 못 알아보고는 결국 그와 같은 돌이킬 수 없는 죄악을 저지르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사실 국내외에 계신 한국의 신학자나 목회자 분들이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나라 기독교의 실상은 어떻습니까.

나날이 부흥하고 있습니까. 성장하고 있습니까. 아니요. 오히려 각 교회마다 크고 작은 문제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 현실 아닙니까.

그렇다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성경이 가짜라서요? 복음이 거짓이라서요?

마태복음 12장 33절
“나무도 좋고 열매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열매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열매로 나무를 아느니라”

그 교회에서 올바른 복음과 올바른 말씀이 선포된다면 교회는 부흥하고 성장하겠지요. 하지만 그러지 못하기 때문에 나날이 문제가 심각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문제가 있는 나무는 문제가 있는 열매 밖에 맺을 수가 없습니다.

복음이 사라지고 말씀이 사라진 교회,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아닌, 돈과 세상적인 명예와 권력만이 넘쳐나는 교회에서 무슨 부흥이 있고 무슨 성장이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누가복음 6장 39절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맹인이 맹인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

지금 우리나라의 교회가 마치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는 격 아니겠습니까.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보면 위기의식이 없습니다.

그렇겠죠. 한 번 구원을 받으면 취소되는 일이 없다고 가르치는데 무슨 위기의식이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사람들이 자기 멋대로 성경을 왜곡하고 엉뚱하게 해석해서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게 되면 결국 둘 다 멸망하고 말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무엇보다 올바른 믿음을 가져야 하고, 그 믿음에 입각해서 올바른 말씀이 심어져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올바른 행함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이제 사람의 방법, 사람의 생각에 따르는 헛된 주장들을 버려버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하고도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이신 성경을 올바로 이해함으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해주신 축복의 면류관, 구원의 면류관을 모두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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