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7회 [면류관 강해 제17회] 예수님의 십자가와 우리의 십자가 (2) - 이루리라교회 홍성필 목사
 

홍성필 목사
이루리라교회
www.이루리라.com
mail@IRURIRA.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8장 34절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설교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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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면류관 강해 17번째 시간으로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우리의 십자가 (2)”이라는 제목으로 해서 지난주의 ‘예수님의 십자가’에 이어서 오늘은 ‘우리의 십자가’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자, 오늘도 면류관 강해의 핵심구절인 요한계시록 3장 11절을 함께 읽고 시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 11절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아멘.

자, 지난 주에 살펴보았던 것처럼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는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것, 즉 오로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만이 지실 수 있는 십자가이셨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지라고 말씀하신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가 아니라, 우리 각자가 져야 할 십자가를 지라고 하신 것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렇다면 다음으로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는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를 알기 위해서는 바로 십자가와 성경 전체의 공통점을 올바로 인식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 성경은 무엇에 대해서 기록된 책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성경 창세기에서부터 시작해서 요한계시록까지 구약 39권 신약 27권 총 66권을 한 단어, 두 글자로 요약하자면 무슨 말로 나타낼 수 있을까요.

성경은 ○○에 대한 책이다. 라고 한다면 여기에 들어가는 두 글자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사랑? 음, 50점. 구원? 음. 80점입니다.

여기에 들어가는 한 단어, 100점짜리 두 글자는 바로 ‘순종’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바로 순종에 대한 책이다’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고는 그들에게 첫 율법을 주셨지요.

창세기 2장 16절~17절
“16.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어쩌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기계처럼 만드실 수도 있었겠지요. 마치 컴퓨터 자판에서 a라는 글자를 치면 a라는 글자가 찍히고, b라는 글자를 누르면 모니터에 b라는 글자가 나오는 식으로 사람을 만드실 수도 있으셨을 것 아니에요.

하지만 그렇게 하면 무엇이 없습니까. 그것은 바로 순종이 없는 것이지요. 키보드에서 누르는 대로 모니터에 찍히는 것을 보고 컴퓨터가 사람에게 순종한다고는 할 수 없잖아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기계나 로봇처럼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만드셨냐 하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할 수도 있고 불순종할 수도 있도록 만드셨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여기서 그 이유가 궁금해지지 않습니까. 아니, 왜 사람을 그렇게 불순종도 할 수 있게 만드셨던 것일까요. 아예 처음부터 불순종하지 못하게 만드셨더라면, 순종만 할 수 있도록 만드셨더라면 우리가 죄를 짓는 일도 없었을 것 아니에요.

하지만 여기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순종에 대한 축복을 주시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이는 성경에서 알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을 어기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창세기 3장 22절~23절
“22.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23.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순종을 버린 그들을 에덴에서 쫓아내시고 생명 나무를 못 먹도록 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말씀은 무엇을 뜻합니까.

이는 바로 사람이 하나님께 순종을 했었더라면 생명 나무의 열매를 먹고 그 아름다운 에덴에서 영원히 살아갈 수 있는 축복을 누릴 수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엄청난 축복을 위해서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엄청나게 어려운 순종을 원하셨던 것인가요?

아니에요. 아담과 하와는 지극히 작은 순종만 하면 족했습니다.

너희들에게 어려운 것을 바라지 않아. 에덴에 있는 수많은 나무들 중에서 딱 하나, 그 나무에 있는 열매를 너희들이 마음만 먹으면 먹을 수 있지만, 내가 먹지 말라고 한 내 말을 지키고 그것을 먹지 않는다면, 그것으로 나에게 온전히 순종한 것으로 여기고 모든 축복을 너희들에게 줄게.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약속하셨던 것이지요.

하지만 아담과 하와는 어떻게 했습니까. 그렇습니다. 그 하나님의 약속을 마치 헌신짝처럼 내버리고 말았지 않습니까.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만드시고는 한결같이 순종을 원하고 계셨습니다.

그렇다면 사랑도 그렇지 않느냐고 하실 지도 모르겠지요. 물론 사랑은 아름답고 소중한 것입니다. 하지만 사랑은 언제나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받는 것은 아니에요.

누가복음 6장을 보실까요?

 
누가복음 6장 32절~34절
“32.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느니라
33.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만을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34.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꾸어 주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그만큼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꾸어 주느니라”

이 말씀은 무슨 뜻이지요? 그냥 무작정 사랑하고 잘해 주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그렇지가 않다는 것이잖아요.

 
모든 사랑과 선대가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자만 사랑하고 자기한테 잘해주는 사람만 잘해주는 것이라면 그것은 죄인들도 하는 일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다시 말해서 그와 같은 사랑과 선대는 무엇이 빠졌어요?

예, 그렇습니다. 바로 순종이 빠진 것이지요.

그러면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세요?

주님께서 원하시는 진정한 사랑,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받는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누가복음 6장 35절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이라는 것은, 비록 나는 원하지 않더라도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랑과 선대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세상에 나에게 잘해주고 내가 사랑하고 싶은 사랑만 사랑해도 모자랄 판에, 원수를 사랑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주님의 말씀을 잘 보세요 ‘원수였던 사람을 사랑하라’가 아니라 ‘원수를 사랑하라’, 그러니까 과거의 원수가 아니라 바로 지금 현재 진행형인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여러분, 원수가 무엇입니까.

국어사전에 찾아보면 원수라고 하는 것은 “원한이 맺힐 정도로 자기에게 해를 끼친 사람이나 집단.”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단순히 나에게 크고 작은 손해를 끼친 정도가 아니에요. 평생동안 잊으려고 해도 잊지 못할 정도로 깊은 상처를 주고 원한이 맺힐 정도로 자신에게 해를 끼친 사람이나 집단이 원수인데 그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요. 웬만한 사람은 이를 자기 마음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이 나는 원하지 않지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랑을 하는 것을 간략하게 주님은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그것이 말하자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무조건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안 한다는 것이 아니에요.

그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것이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있어요.

이 두 가지가 똑같으면 더할 나위 없겠습니다만, 그것이 일치하지 않을 때에, 내 생각이 아닌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자기 부인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은 예수님 스스로가 자기 부인을 보여주셨습니다.

마태복음 26장 39절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이 기도를 보십시오. 할 수만 있다면 예수님도 십자가를 피하고 싶으셨습니다.

그러나 뭐예요? 예, 그렇습니다.

 
비록 저는 원하지 않지만 하나님 아버지께서 원하신다면 제가 십자가를 지겠습니다 라고 말씀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것이야 말로 자기를 부인하고 순종이라는 이름의 십자가를 지는 진정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서 어떤 십자가를 져야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선 우리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야 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는 줄 믿습니다.

 
세상에서는 ‘인사가 만사’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어느 기업이든 조직이든 하물며 나라든 간에 인사관리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지요.

사람을 적재적소에 배치하게 되면 그 조직은 발전하겠지만, 이를 그르치게 되면 그 조직은 엉망이 되고 맙니다.

하지만 이게 그리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에요.

예를 들어서 어느 회사를 한 번 생각해보세요.

어떤 사람을 A라는 부서에 배치했어요. 그랬더니 일을 잘해요. 그래서 대리로 승진시켰더니 또 잘해요. 그래서 과장으로 승진시켰어요. 그랬더니 일을 못해요. 그럼 과장에서 더 이상 승진이 안되겠죠?

다음에는 어떤 사람을 B라는 부서에 배치했어요. 그랬더니 일을 잘해요. 그래서 대리로 승진 시키고 과장으로 승진시켰는데 계속 일을 잘해요. 그래서 차장으로 승진을 시켰는데 그러자 일을 못해요. 그러면 차장에서 스톱이 되겠지요?

 
이런 식의 인사관리가 정상이라고 생각하실 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되면 어떤 일이 발생하냐 하면 조금 지나면 모든 사람들이 다 일을 못하는 곳에만 앉아 있게 되고 맙니다. 그렇잖아요. 성과를 내면 더 올라갈 텐데, 성과를 못 내니까 다 그 자리에 있게 되는 것이잖아요.

이러면 어떻게 돼요? 예, 바로 그 조직은 머지않아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게 되고 말 것입니다.

이처럼 인사관리라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리고 또 인사라고 한다면 영전과 좌천이라는 말도 있지요?

이른바 출세코스나 요직으로 발령이 나면 영전이라고 하지만, 별볼일 없는 지역이나 부서로 가게 되면 이를 좌천이라고 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주님은 인사관리에 있어서 탁월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무리 규모가 크고 유능한 사람들이 몰려 있는 회사나 조직이라 하더라도,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니 완벽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인사이동이 문제가 되는 경우가 상당히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은 인사관리에 있어서 완벽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주님 안에 있어서의 인사이동에는 좌천이 없습니다. 한직이 없어요.

주님 안에서는 모든 이동이 영전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같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있어야 할 곳이 다르고 맡겨진 일들이 다릅니다. 감당해야 하는 일들이 모두 다르다는 것이지요.

이와 같은 말씀이 성경에도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 12절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우리의 몸도 그렇잖아요. 하나의 몸이라 하더라도 각 지체마다 그 역할이 다릅니다. 눈은 보아야 하고 귀는 들어야 하고 코는 냄새를 맡아야 합니다.

각 지체마다 그 기능이 다르고 서로가 각각의 역할을 잘 감당해야만이 하나의 몸이 건강한 것처럼, 우리도 내가 있는 곳에서 내가 맡은 일을 감당하면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할 때에 주님께서 주시는 진정한 축복이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를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채찍에 맞으시고는 온몸이 피범벅이 되어서 십자가를 지시고는 골고다로 향할 때를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진정한 순종의 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그 길이 많은 사람들부터 박수를 받는 길이었습니까.

십자가에 달리신 다음은 어떻습니까. 그 모습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할렐루야! 감사합니다! 하고 외쳤습니까. 아니요. 오히려 사람들의 태도는 싸늘했습니다. 

마태복음 27장 39절~44절
“39.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40.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41.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42.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43.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44.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아니, 지금 예수님은 누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까. 다 자기들을 위해서 하나님께 순종하신 것이잖아요.

하지만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주위에는 온통 예수님을 모욕하고 희롱하고 욕하는 사람들로 넘쳐났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순종에 대해서 주위에서는 누구 하나 인정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이를 보신 예수님이 도중에 포기하셨대요? 뭐? 내려오면 믿겠다고? 그래, 자 봐라. 내려왔다. 어쩔래. 그러셨습니까. 아니에요.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묵묵히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순종을 온전히 바치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순종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모습을 말하는 것입니다. 남들이 박수 쳐주면 하고, 알아주지 않으면 안 한다거나, 하물며 돈이 되면 하고 돈이 안 되면 안 한다?

그것이 어떻게 순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진정한 순종이라고 하는 것은 내 입에 달면 먹고 쓰면 뱉는다거나, 남이 알아주면 하고 안 알아주면 집어 던지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 말씀대로 하는 것이면 하고 하나님 말씀에 어긋나면 하지 않는 것,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 주신 일을 감사하며 묵묵히 감당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순종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은 그러면 언제까지 순종하셨다고 성경은 기록하지요?

빌립보서 2장 8절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와 같은 순종은 한 번 하고 마는 것이 아닙니다. 한 번 믿으면 구원 받았으니 이제는 취소되지 않을 테니까 안심해도 된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 드린 아담과 하와의 경우를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께서는 그들로부터 순종을 받기를 원하셨지만, 그러면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셨던 열매를 아담과 하와가 하루나 이틀만 안 먹으면 그것이 순종입니까. 아니에요.

그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먹지 않는다고 하는 순종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순종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도 한 두 번 순종하신 것이 아니라 죽으실 때까지 순종하셨다고 하는데 우리가 어찌 몇 번만 순종하면 됐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지난 주에 말씀드렸던 찬송가 216장 이야기로 돌아가 볼까요.

새찬송가 216장 제목은 “성자의 귀한 몸”이라는 찬양은 다른 대부분의 찬송가가 그렇듯이 영어 가사를 번역한 것이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원래 가사를 찾아봤어요. 그랬더니 원곡에는 ‘주님의 십자가를 내가 진다’는 내용은 없어요. 그 대신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십자가를 짊어질 수 있도록 나를 도와 주세요(Help me the cross to bear)”라는 가사가 2절에 있더라고요.

이 가사는 정말 놀라운 고백 아닙니까.

“십자가를 짊어질 수 있도록 나를 도와 주세요”

이는 개인적으로 특별히 요즘의 제 기도 제목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주님께서 내게 지라고 하신 그 십자가를 내가 짊어질 수 있도록 도와 주세요.

주님께서 내게 주신 그 사역을 끝까지 순종하며 잘 감당할 수 있도록 나를 도와 주세요.

이는 바로 우리가 우리의 십자가를 짊어질 때, 우리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나아갈 때, 지치지 않도록, 넘어지지 않도록, 낙심하지 않도록, 포기하지 않도록, 좌절하지 않도록, 절망하지 않도록 주님께 도움을 구하는 고백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주님이 그냥 아무런 생각없이, 또는 잘못해서 실수로, 아니면 어쩌다가 우연히 우리를 지금 이 자리로 인도하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분명 지금 우리가 있는 이 자리에서, 우리로부터 받고자 하시는 순종이 있으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난 주에 살펴본 바와 같이, 2천년 전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기 때문에 사람을 통해 사람의 모습으로 오셨어야 했습니다만, 이제 다시 오실 때에는 더 이상 죽으실 필요가 없기에 왕 중의 왕이신 영광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실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여러분이 감당하고 계신 순종은, 그 너머에 틀림없이 주님께서 예비해주신 놀라운 상이 있으실 줄 믿습니다.

이제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순종의 십자가를 기억하면서, 우리가 지금 있는 자리에서 져야 할 순종이라는 이름의 십자가를 끝까지 짊어지심으로 말미암아, 마지막 날에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해 주신 생명의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을 모두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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