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3회 [면류관 강해 제14회] 가룟 유다와 시몬 베드로 - 이루리라교회 홍성필 목사
 

홍성필 목사
이루리라교회
www.이루리라.com
mail@IRURIRA.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21장 15절~17절

“15.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16.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17.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설교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십일조, 감사헌금, 개척후원, 선교후원
온라인 후원
KB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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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면류관 강해 14번째 시간으로서 “가룟 유다와 시몬 베드로”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자, 오늘도 면류관 강해의 핵심구절인 요한계시록 3장 11절을 함께 읽고 시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 11절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아멘.

우리에게 있어서 가룟 유다와 시몬 베드로는 상당히 대조적인 인물로 기억되기 쉽습니다.

가룟 유다는 누구입니까.

마태복음 26장 15절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우리가 다 알다피시 그는 예수님을 팔아 넘겨서 결국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한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제사장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했으나 백성들을 두려워해서 마땅히 잡아오지 못했을 때, 유다는 예수님이 제자들과 한적한 곳에 계실 때에 제사장 군인들을 이끌고 가서 넘겨주게 됩니다.

유다는 그 대가로 은 삼십을 받았다고 합니다만 이는 삼십 세겔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세겔은 4데나리온이라고 하는데, 1데나리온이 노동자 일당이라고 해요.

제가 항상 말씀을 전할 때 그렇게 하듯이 편의상 1데나리온을 10만원으로 한다면 1세겔은 4데나리온이기 때문에 40만원이지요?

 
1세겔은 40만원이라고 한다면 30세겔은? 예, 1200만원 정도가 되는 금액입니다.

가룟 유다가 저들에게 예수님을 팔아 넘긴 이유가 지금 돈 1200만원 정도의 돈을 원해서였는지에 대해서는 신학자들의 견해가 갈립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였는데 예수님께서 마치 구약시대 때의 사사들처럼 백성들의 선봉에 서서 로마를 물리치고 해방을 시킬 줄 알았던 유다가 예수님에 대해서 실망을 했기 때문에 배신하게 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는 어디까지나 상상이지요. 성경에 그와 같은 내용은 적혀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또 누구는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어요. 예수님께서 자신을 그들에게 넘겨주도록 유다에게 시켰다는 것이에요.

예수님은 본래 십자가에 달리시기 위해서 오셨다고 할 수 있잖아요. 그러니까 그 계기를 유다에게 말하자면 부탁했다는 주장입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로 드는 것 중 하나가 이른바 유다복음이라고 하는 것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가룟유다가 쓴 서한이라고 하는데 여러분 중에 혹시 들어 보신 적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조심하셔야 하는 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 66권 중 계시록 앞에 나오는 ‘유다서’와는 달라요. 성경에 있는 유다서는 가룟 유다가 쓴 것이 아닙니다.

유다서를 누가 썼느냐에 대해서는 이 또한 견해가 일치하지는 않습니다만 가장 유력한 인물로서는 예수님의 육신의 형제라고 보고 있습니다.

카톨릭에서는 예수님 만이 아니라 마리아까지를 신성시 하면서 마리아를 무슨 영원한 동정녀라고 하기도 하는데, 아니요. 성경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13장에 보시면 예수님께서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나사렛에 가셔서 말씀을 전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그와 같은 예수님을 보고 고향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세요.

마태복음 13장 54절~56절
“54.고향으로 돌아가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그들이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냐
55.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56.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그런즉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냐 하고”

이 기록을 보시면 어떻습니까. 육신으로 본다면 마리아는 예수님을 처음 낳은 다음에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그 다음에 다른 형제들을 낳았어요. 뿐만 아니라 여기에 이름은 안 나와 있지만 누이들, 그러니까 여동생들도 있었다는 말씀 아니에요?

성경 말씀처럼 마리아는 요셉과 혼인을 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되어 예수님을 낳았습니다만, 그 동생들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요셉과의 사이에서 두었다고 해야 하잖아요.

그러니까 마리아는 예수님 출산 이후에 아이를 낳지 않은 것이 아니라, 요셉과 살면서 아들딸 낳고 다복한 가정을 이루었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여기에 보시면 흥미로운 기록이 나오잖아요?

마태복음 13장 55절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이 기록에 의하면 야고보와 유다라는 이름이 보입니다.

그리고 야고보서와 유다서 각각 1장 1절을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야고보서 1장 1절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유다서 1장 1절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는 부르심을 받은 자 곧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라”

 
바울서신이나 베드로서를 보면 자신이 사도일 경우 ‘사도’라는 사실을 밝히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 두 기록 모두 ‘사도’라는 언급이 없습니다.

그리고 특히 유다서인 경우에는 ‘야고보의 형제’라는 언급으로 보아서 야고보와 유다는 비록 육신으로는 예수님의 형제이긴 합니다만 예수님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을 가리켜 모두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하고 있는 것이고, 특히 유다는 ‘그리스도의 종’이면서 ‘야고보의 형제’라고 하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자신이 예수님이나 야고보와 마찬가지로 마리아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신학관련 문헌에는 정경 이외에도 외경과 위경이 있습니다.

외경의 경우에는 정경 66권에 포함되지는 않았으나 성경연구에 있어서 참고가 될 만한 자료라고 하겠습니다만, ‘위경’이라고 할 때의 ‘위’는 ‘거짓 위’라는 한자를 사용하는데 말 그대로 거짓 자료인 것이지요.

앞서 잠시 말씀드린 유다복음은 전승에 의하면 가룟 유다에 의해 기록된 것이라고 하는데, 이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 66권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도 예전에 신학교 시절, 가룟 유다가 썼다고 하는 유다복음이라는 것을 읽어 보았습니다만, 글쎄요. 신학을 연구하시는 분들에게는 참고자료가 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는 다른 성경과는 그 내용에 있어서 전혀 일관되지 않는 자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우리 신앙이나 성경 이해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겠지요.

아마도 나중에 어떤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위경, 즉 거짓 자료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신학자들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가룟 유다는 왜 예수님을 배신한 것일까요.

사실 알고 보면 성경에는 이에 대해서 명확하게 답을 주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3장 2절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이 기록을 보면 어떻습니까. 사실 세상적인 이유가 무엇이 중요하겠습니까. 결국 가룟 유다는 마귀에게 속아서 예수님을 배신하게 되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어떤 경우에 마귀가 사람 안으로 들어온다고 합니까.

이 또한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마태복음 12장 43절~45절
“43.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고
44.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45.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여러분, 아무리 사람 마음이 깨끗하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을 비어 둔 채로 방치하게 된다면, 그 빈 자리는 누가 차지해요? 그렇습니다. 마귀가 차지하게 될 수 있다고 성경은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지 않습니까.

그저 예수님과 함께 다니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데요?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까.

요한복음 13장 20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아무리 진수성찬이 옆에 놓여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내가 먹지 않고 있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처럼, 아무리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께서 눈앞에 계신다 하더라도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로 시인하고 영접하지 않는다면 구원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부지런히 오랫동안 교회만 다니고 직분을 많이 받았다 하더라도 진정으로 주님을 우리 마음 안에 모시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사야 1장 11절~12절
“11.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너희들의 마음이 없이 그저 교회만 다닌다고 해서 내가 기뻐할 줄 알아? 마음에도 없는 제물을 바친다고 내가 좋아할 줄 알아? 그럴 거면 아예 나오지 마. 내 성전만 더러워질 뿐이야.

지금 하나님께서는 그러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유다가 바로 그런 격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 하더라도 예수님을 진정으로 우리 구주로 영접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눈앞에 예수님이 계신다 하더라도 아무런 소용이 없이 결국 마귀 사탄의 먹이가 되어서 예수님을 배반하게 되고 말았지 않습니까.

결국 가룟 유다의 최후는 비참했습니다.

마태복음 27장 5절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그가 다시 예수님 앞에 나오는 일은 없었어요. 다만 홀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주님은 가룟 유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세요.

마태복음 26장 24절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 이 정도로 심하게 말씀하시는 경우도 드물어요. 가룟 유다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을 뻔 했다.

사랑의 주님께서 이 정도로 말씀하시는 이유가 왜겠습니까. 차라리 안 태어났으면 좋을 뻔했다고 말씀하신 이유, 그것은 바로 구원을 받지 못했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다른 곳은 경험삼아 가본다고는 하지만 절대로 가서는 안 되는 곳이 있지요? 예, 그렇습니다. 바로 지옥인 것이지요.

지옥에 대해서 성경에는 많은 기록이 없습니다만, 몇 안 되는 구절만으로도 그 끔찍함을 알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9장 48절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누가복음 16장 23절~24절
“23.그가 음부에서 고통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24.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이런 곳에서 영원히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고통을 받게 된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럴 바에야 차라리 태어나지 않은 편이 더 나았겠다는 말씀이 안 나오겠습니까.

결국 가룟 유다는 끝까지 구원을 받지 못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베드로는 어떻습니까.

그는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서 대표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매사에 있어서도 나서기 좋아하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시면 남들이 입을 열기 전에 자기가 먼저 대답하고 그랬던 사나이가 바로 베드로라고 할 수 있겠지요.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한 사람이고 반면에 시몬 베드로는 충실한 제자라고 많은 사람들에게는 기억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서로 대조되는 점이 강조되기 십상입니다만, 사실 그들에게는 적지 않은 공통점도 있습니다.

우선 그들은 둘 다 사도였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가룟 유다가 정확히 언제 예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았는지는 모릅니다만, 3년 정도로 보이는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 베드로나 유다나 모두 예수님 곁에서 함께 지냈다는 사실을 성경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공통점이 있지요. 그것은 바로 베드로 또한 예수님을 배신한 적이 있다는 점입니다.

마태복음 26장 31절~34절
"31.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32.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33.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34.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유월절 식사 자리에서 예수님이 잡히실 것을 말씀하시고 그 때에 너희들이 다 나를 버릴 것이다. 이렇게 말씀을 하시자 역시 누구보다 먼저 베드로가 입을 엽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 주님을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칭찬을 하세요? 아니요.

"네가 오늘 밤 닭이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참 난감하죠? 며칠 뒤도 아닌 바로 오늘 밤에 나를, 그것도 세 번이나 부인할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아마도 짐작컨대 여기에 대해서는 그 주위에 있던 제자들 모두가 믿지 못했을 지도 모르지요.

그리고 누구보다 베드로 자신이 믿지 못했을 것입니다.

어찌 그런 일이 있겠습니까. 하늘이 두 쪽 나더라도 그와 같은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다. 그렇게 믿었는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어떻게 됩니까. 예, 불과 몇 시간 뒤, 그야말로 입에 침도 안 마른 사이에 일은 터지고 말지요.

 
마태복음 26장 69절~75절
“69.베드로가 바깥 뜰에 앉았더니 한 여종이 나아와 이르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70.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노라 하며
71.앞문까지 나아가니 다른 여종이 그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되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매
72.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73.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진실로 그 도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하거늘
74.그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곧 닭이 울더라
75.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베드로는 그 짧은 사이에 예수님을 정말로 부인을 했어요. 그것도 정말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을 했습니다.

이를 두고 베드로의 죄가 가룟 유다보다 가볍다고 생각하시나요?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누가복음 12장 8절~9절
“8.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9.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을 당하리라”

누구든지 예수님을 시인하면 예수님도 우리를 시인해 주신대요.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부인하면 예수님은 우리를 부인한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우리를 부인하는데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베드로는 어떻게 했습니까.

예, 한 번 부인하는 것도 큰 죄인데 무려 세 번이나 부인을 했어요.

마지막에는 뭐라고 했다고 합니까.

마태복음 26장 74절
“그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곧 닭이 울더라”

개역개정 성경에 있어서 이 말은 좀 오해할 수가 있겠는데, 그렇다고 베드로가 상대방을 저주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자, 현대인의 성경판을 볼까요?

현대인의 성경판 마태복음 26장 74절
“베드로는 만일 자기가 그런 사람이라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맹세하면서 '나는 정말 그 사람을 모릅니다.' 하였다. 바로 그때 닭이 울었다.”

그러니까 이는 무슨 뜻인가 하면, 상대방이 베드로 보고 그러죠? 너 그 말투를 들으니까 너도 저 예수와 같은 패거리네. 그러잖아요.

그러니까 베드로가 그럽니다.

“뭐가 어째? 이봐, 내가 맹세하겠는데 말이야. 내가 저 사람과 한 패라면 내가 천벌을 받을 거야” 이렇게 말을 했다는 뜻인 것이지요.

저녁 식사 자리에서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을 버린다 하더라도 자기만은 버리지 않겠다면서 호언장담을 했던 베드로. 그러나 베드로는 동이 트기도 전에, 그것도 한 번도 아닌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지 않았습니까.

이 사실을 깨달은 베드로는 어떻게 했대요?

마태복음 26장 75절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그렇습니다. 대성통곡을 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얼마나 자기 자신이 못났다고 생각했을까요.

그렇다면 예수님은 베드로가 실제로 부인을 했다는 사실을 아셨을까요? 모르셨을까요?

누가복음에는 그 순간이 극명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 22장 60절~62절
“60.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아 나는 네가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고 아직 말하고 있을 때에 닭이 곧 울더라
61.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62.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아이고 참 예수님도. 사람 민망하게 왜 하필이면 그 순간 베드로를 돌아 보셨을까요.

이유야 간단하죠. 거봐. 내가 뭐랬어. 그러신 것 아니겠습니까.

앞서 마태복음 27장 5절에서 본 바와 같이 예수님이 팔려가는 모습을 본 유다는 전에 받았던 은 삼십을 성전에 던져 넣었다고 하잖아요?

유다도 크게 후회를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죄책감을 못 이기고 스스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던 것이겠지요.

 
어쩌면 베드로도 크게 후회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을 생각을 했었는지도 모르지요.

만약에 그대로 예수님 또한 베드로를 버리고 영영 떠나셨다면, 정말로 베드로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거나 또는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안고 평생을 낙오자로 살아갔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어떻게 되었어요? 예, 그렇습니다. 부활한 예수님이 다시 베드로를 만나 주셨어요.

 
오늘 본문에서의 장면, 부활하신 예수님이 베드로를 만났을 때의 장면은,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감동적인 순간이라고 여겨질지는 모르지만 자세히 보시면 분위기가 좀 이상합니다.

3년 동안 같이 다니면서 가르쳐 놨더니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자 그들은 또다시 고기잡이로 돌아갔습니다.

이전과 전혀 달라지지 않았어요. 거기다가 베드로는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주님도 아신다는 사실을 베드로도 알고 있어요.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만 이는 분명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도 없었을 거예요.

너무나도 반갑기는 하지만 예수님 얼굴을 볼 낯이 있었겠습니까. 예수님 앞에서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그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는지도 모를 노릇이지요.

“너 베드로 믿음이 작은 자야. 왜 나를 부인했느냐.”

예수님의 입에서 이 말씀이 언제 나올까 하고 조마조마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를 탓하지 않으십니다. 그 대신 뭐라고 하세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여기 있는 다른 제자들보다 나를 사랑하느냐.”

참 이 말씀을 들을 때 베드로는 한없이 작아졌을 것입니다.

오죽하면 오늘 본문 17절에 의하면 베드로가 근심하면서 대답했다고 하잖아요.

아이, 참 죄송하고 부끄럽게 왜 자꾸 물으세요. 당연히 사랑하죠. 주님이 잘 아시잖아요.

 
예수님은 그의 입에서 세 번의 사랑 고백을 들으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이 베드로를 난처하게 만들기 위해서요? 예수님이 베드로를 궁지에 몰아넣게 하기 위해서요?

아니요. 그게 아니라 바로 후회와 자책감과 자괴감으로 상처 입은 베드로를 치료하고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과연 베드로를 탓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께서는 만일 그 때, 예수님께서 끌려가시는 바로 그 자리에 계셨더라면, 여러분은 끝까지 예수님을 지키기 위해 목숨 걸고 싸웠을 자신이 있으신가요?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끌려가실 바로 그 때,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서 누가 예수님과 끝까지 함께 했습니까. 도망치지 않고 끝까지 예수님 곁을 지켰던 사람은 누구입니까.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마가복음 14장 50절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그렇습니다. 도망친 것은 베드로만이 아니었어요. 3년 동안 가르쳐 놨더니만 기껏 하는 짓이, 예수님께서 잡혀 가시는 그 결정적인 순간에, 자기 목숨 하나 살리려고 다들 도망쳤대요.

어떻게 하고 도망쳤대요?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쳤다는 것이에요.

 
그러면 거기서 도망친 그들은 과연 가룟 유다를 탓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친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을 배신한 가룟 유다보다 낫다고 할 수 있을까요?

이는 그야말로 오십 보 백 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어떨까요.

우리는 예수님을 배신한 가룟 유다보다는 나은 존재인가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보다는,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친 다른 제자들보다는 나은 존재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로마서 3장 23절~24절
“23.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오면서 얼마나 많이 하나님을 배신하고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왔습니까.

우리는 예외 없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 존재, 하나님 나라의 근처에도 갈 수 없는 존재에 불과합니다.

로마서 6장 23절 말씀처럼 죄의 삯은 사망 아니겠습니까. 그야말로 영원한 지옥불에 떨어져야 마땅한 존재,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다면 좋을 뻔한 존재에 불과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은 어떻게 기록합니까.

 
로마서 4장 25절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 주심으로 인해서 우리의 죄가 사해지고, 또한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의로운 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자가 되게 해 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 흘려 주신 그 보혈의 능력으로 구원 받지 못한다면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불문하고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다 가룟 유다나 마찬가지입니다.

여차하면 예수님을 배신하고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을 버리고 세상 속으로 또는 자기 생각 속으로 도망쳐 버리는 죄인 아닙니까. 꺼지지 않는 불구덩이 속에서 끔찍한 고통을 영원토록 받게 되는, 그야말로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을 뻔한 인생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스스로의 죄를 뉘우치고 주님께로 달려가기만 하면, 주님은 우리를 기쁘게 받아 주시고 회복시켜 주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도행전을 읽으면 알 수 있듯이 다시 예수님께로 돌아와 회복된 베드로는 초대교회를 세우는 데에 굳건한 반석으로 쓰임을 받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를 보고 저는 그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예수님을 배신한 가룟 유다도 부활하신 예수님께로 돌아왔더라면 주님에 의해 모든 것을 용서 받고 모든 것이 회복되어 귀하게 쓰임을 받을 수 있었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는 주님께로 돌아오지 않은 채 결국 비참한 길로 떠나버리고 말았던 것이지요.

요한계시록 3장 20절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지금 주님께서 우리의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문을 열고 예수님을 모셔 들이시겠습니까. 아니면 예수님을 버려 두고 도망치시겠습니까.

 
이제 문 밖에 서서 주님이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실 때, 내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 우리의 구주 되신 예수님을 모셔 들이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것이 회복되고,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해주신 생명의 면류관, 구원의 면류관을 모두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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